ADVERTISEMENT
오피니언 노트북을 열며

이게 다 영화 때문이라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이후남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여러 해 전 개봉했던 외국산 공포영화 제목이 지난주 끔찍한 살인사건 뉴스와 나란히 인터넷에 주요 검색어로 오르내렸다. 이 영화 제목을 신문에 전혀 언급하지 않은 중앙일보와 달리 일부에선 사건과 큰 관계가 있는 듯 여기게 하는 보도를 쏟아냈다.

그런데 이 보도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이 영화 이름은 범행을 자백한 남성 입에서 나온 게 아니다. 문답으로 정리된 보도 내용에 따르면 그는 이 영화를 봤느냐는 질문에 ‘봤다’고 답했고, 어떤 느낌을 받았느냐는 질문에 ‘그냥 이런 영화도 있구나 했다’고 말했다. 또 앞서의 문답에서 평소 자주 본 영화로 ‘공포영화’를 꼽고, 실행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봤느냐는 질문에 ‘한 번쯤은’이라고 답한 게 전부다. 해당 영화를 옹호할 생각은 전혀 없다. 하지만 이 문답을 토대로 특정 영화가 이 사건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면 견강부회(牽强附會)란 생각이다.

 올가을 새 영화 ‘소원’의 개봉을 앞둔 이준익 감독을 엊그제 잠시 만났다. 신작 얘기 대신 그는 “사실과 진실은 다르다”거나 “본질은 말과 생각이 아니라 선택과 행동에 있다”는 얘기를 꺼냈다. 아니나 다를까 최근의 살인사건 얘기도 나왔다. 이를 영화 때문이라고 하는 건 “비겁한 변명”이라는 게 그의 말이다.

 이번 사건과는 다른 경우지만, 국내외에서 흉악 범죄를 저지른 이들이 가끔 특정 영화를 언급할 때가 있다. 그들이 이런 말을 한 건 사실이라고 해도 사건의 진실과는 거리가 있다. 이는 마치 피해자가 짧은 치마를 입었기 때문에 성폭행을 저질렀다는 식의 범죄자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발언은 책임을 회피하려는 범죄자의 변명, 나아가 사회적 변명이 될 우려가 있다. 이번 사건을 비롯해 도대체 왜 이런 범죄가 벌어졌는지, 이를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사회적 고민을 엉뚱한 방향으로 이끌 위험이 있다.

 기실 영화나 게임의 폭력성이나 잔혹성, 혹은 범죄 수법의 상세한 묘사는 오랜 논쟁거리다. 범죄는 물론 청소년 정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여러 의견이 존재한다. 만일 이 모든 게 영화 탓이라면 해법은 간단하다. 영화라는 장르 자체를 전면 금지시킨다 해도 어쩔 수 없다는 게 개인적 생각이다. 암만 훌륭한 영화라도 한 사람의 인생이나 목숨보다 가치가 중할 수 없다. 이준익 감독은 이런 얘기도 했다. 일본 기타노 다케시 감독이 한 말이라는데, 전체로 보면 세상을 아름답고 따뜻하게 그린 영화가 훨씬 많은데 그 영화들의 영향은 다 어디로 갔느냐는 게 요지다. 그러게 말이다. 게다가 범죄 사건의 피해자들과 가족들의 고통을 절절히 그려낸 영화도 적지 않다. 영화라는 매체는 만능도, 절대선도 아니다. 특정 영화가 사회적 비판을 받을 때도, 받아야 할 때도 분명 있다. 그러나 엉뚱한 해석과 비판은 변명거리를 양산할 따름이다.

이후남 문화스포츠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