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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누구냐 … 재계 "본업보다 검찰·국세청에 안테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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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16일부터 전격 시작된 특별 세무조사에 대해 롯데쇼핑과 롯데그룹은 “세무조사 후폭풍이 어디까지 미칠 것이냐”며 긴장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조사 첫날 사전 예고 없이 들이닥친 서울 국세청 조사4국 직원 150여 명은 롯데쇼핑 대표와 재무·마케팅·신규 사업 등 주요 임원 집무실에서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복사해 간 것으로 전해졌다. 롯데마트에서는 전산실과 재무실 주요 임원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복사해 갔다. 롯데쇼핑 측은 “이번 주 내로 국세청에서 상주 여부를 통보해 주기로 했다”고 전했다. 조사 기간에 대해서는 120일로 통보받았다고 덧붙였다.

 롯데그룹의 지주회사 격인 비상장 기업 롯데호텔 세무조사에 이어 그룹의 주력사 롯데쇼핑이 세무조사를 받게 된 데는 세무 당국이 그룹의 국외 자금 거래를 집중적으로 들여다보기 위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롯데쇼핑이 그룹 해외 진출의 자금줄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그간 롯데쇼핑은 2006년 국내와 영국 런던 증시에 동시에 상장된 후 글로벌 본드, 해외 전환사채 발행 등을 통해 그룹의 인수합병(M&A) 자금을 마련하는 창구를 맡아왔다. 2009년 국세청의 세무조사 이후에도 롯데쇼핑은 그룹 내 크고 작은 M&A를 주도해 왔다.

롯데그룹, 해외 자금 파악 나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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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900억원의 중국 타임스 수퍼 인수(2009년 12월), GS리테일 백화점·마트 부문 1조3000억원(2010년 2월), CS유통 2500억원(지난해 1월), 그랜드마트 2개 점 1540억원(지난해 5월), 하이마트 1조2480억원(지난해 11월)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해외 M&A 때는 페이퍼컴퍼니 등을 설립해 진행하는 경우도 있어 국세청이 이를 꼼꼼히 살펴볼 것으로 예상된다. 그룹의 구조조정본부 역할을 하는 ‘정책본부’, 그리고 신규 사업과 M&A를 총괄하는 국제실도 모두 롯데쇼핑 소속이다.

 롯데쇼핑이 그룹 내 ‘환상(環狀)형 출자 구조’의 핵심에 있기 때문에 이처럼 그룹 경영과 전략을 총괄하는 핵심 부서들이 몰려 있는 것이다.

 롯데쇼핑은 신격호(91) 총괄회장이 0.93%, 신동빈(58) 롯데그룹 회장이 13.46%, 신동주(59) 일본 롯데그룹 부회장이 13.45%, 신영자(71) 롯데장학재단 이사장이 0.74% 등 오너 일가 지분이 28.67%이다. 계열사 등 특수 관계인을 합칠 경우 70.01%에 달한다. 롯데쇼핑→롯데캐피탈→롯데카드→롯데칠성음료를 거쳐 다시 롯데쇼핑으로 연결돼 있는 순환 출자 구조, 또한 롯데쇼핑→롯데리아→롯데정보통신→롯데쇼핑 등으로 돌아오는 순환 출자 구조의 정점에 있다.

 어쨌든 이재현 CJ그룹 회장이 검찰 수사를 받는 와중에 롯데 계열사에 대한 세무조사까지 돌출하자 재계는 ‘시계제로’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뜩이나 안팎의 경기 악화로 고전하고 있는 상황에서 경제민주화 요구, 검찰·국세청·공정거래위원회 등 사정기관들의 잇따른 조사·제재로 전에 없이 위축된 탓이다.

‘서너개 그룹 사정 1순위’ 풍문 무성

 익명을 원한 한 대기업 임원은 “일부 기업들은 본업보다 서초동(검찰)과 종로(국세청) 쪽에 더 예민하게 안테나를 세우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금 더 직접적으로 표현해 ‘다음 타자(조사받을 회사)가 누구냐’에 온통 관심이 쏠려 있다는 얘기다. 재계에는 이미 “A그룹이 사정 1순위가 될 것이다. B그룹, C그룹이 먼저다” 같은 풍문이 무성한 상태다. 모두 오너 2세에 대한 일감 몰아주기, 비자금 조성 의혹, 이명박정권 특혜설 등으로 한두 차례 도마에 올랐던 곳들이다.

 이 같은 소문이 확대 재생산되면서 일부 기업들은 엉뚱한 곤욕을 치르기도 한다. 이달 초부터 압수수색을 받고 있는 D상사는 검찰이 그룹 총수를 겨냥하고 있다는 루머가 도는 바람에 속앓이를 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서울중앙지검 외사부와 관세청 서울세관 등에서 40여 명의 조사 인력이 투입되면서 ‘더 큰 게 있다’는 추측을 낳고 있는 것. 러시아에서 수입한 기계부품의 가격을 조정해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혐의로 관세청 조사를 받고 있는 E상사 역시 곤욕스럽기는 마찬가지다. 회사 관계자는 “이런 상황에서 구설에 오르는 것 자체가 피곤한 일”이라고 하소연했다. 또 다른 대기업 임원은 “대통령은 ‘투자하는 기업은 업고 다닐 것’이라고 독려하고 있지만 요즘 재계의 분위기는 투자는커녕 기지개도 함부로 못 켜는 상황”이라고 꼬집었다.

 실제로 대기업의 투자·고용 시계는 ‘일단 정지’ 또는 ‘연기’ 상태다. 전국경제인연합회에 따르면 자산 30대 그룹 가운데 6곳이 연초에 세웠던 투자 계획을 축소할 것으로 집계됐다.

 또 4개 그룹은 채용 규모를 예정보다 줄이기로 했다. 전경련 배상근 경제본부장은 “경제민주화 입법, 세무조사, 검찰 수사가 겹치면서 올해 예정됐던 대기업 투자의 집행 속도가 예전보다 늦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중소기업들도 요즘 같은 분위기가 난감하기는 마찬가지다. 언제 자신들에게도 불똥이 튈지 몰라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 서울사진앨범인쇄협동조합 김현식 이사장은 “정부가 복지예산 마련을 위해 기업에 대한 세무조사를 강하게 할 것이라고 걱정하는 기업이 많다”며 “없는 곳간에서 돈을 빼줄 수도 없고 결국 중소기업으로부터 세금을 더 거둬들이지 않겠느냐”고 우려했다.

중소기업들도 불똥 튈까 촉각

중소기업중앙회 고위 관계자는 “전방위적인 세무조사와 검찰 수사, 현금 거래 정보 추적 등이 계속되면 기업의 투자 의욕은 꺾일 수밖에 없다”며 “이 같은 문제가 중소기업 경영에도 큰 불안 요인이 된다”고 말했다. 정책 기조를 경제민주화에서 경제 ‘활성화’로 전환해야 한다는 조심스러운 주문이기도 하다. 인천대 홍기용(경영학) 교수는 “경기 침체기에 세무조사로 확보할 수 있는 세수는 한계가 있을 뿐 아니라 부작용도 적지 않다”며 “정부는 거시 정책은 물론 기업 정책 전반을 다시 손봐야 한다”고 말했다.

최지영·이상재·김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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