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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자동차업계에 군림한 어느 한국인의 『맨 주먹 입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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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상파울루=최공필 통신원】6·25때 국군에 귀순, 포로가 되었다가 휴전과 동시에 포로교환으로 풀려나 맨 주먹으로 「브라질」에 이민, 지금은 「브라질」일류의 자동차 부속 및 공구제작회사를 경영하  반공포로 출신의 한국인이 화제를 모으고 있다. 화제의 주인공은 「브라질」「사파울로」주의 「준디 아이」시에서 「수아비스」공구제작회사의 실질적인 사장으로 있는 이봉엽씨. 지난 4월3일자 「브라질」의 한 일간지는 『전쟁도 그를 파멸시킬 수 없었다』라는 제목아래 이씨의 이야기를 대서특필하고, 그를 근면·성실한 경여자라고 칭찬했다.
6·25 당시 겨우 15세의 몸으로 북괴에 의해 학도병으로 끌려 나갔던 이씨는 유명한 「철의 삼각지대」 전투에서 북괴군 1개 사단 1만4천명이 절명 당하고 오직 11명의 생존자만이 남은 속에 기적적으로 끼여 국군에 귀순했다.
53년7윌 휴전협정으로 이씨에게는 북괴냐, 아니면 제3국이냐의 둘 중 하나를 선택할 기회가 부여되었으나 이씨는 북괴로 돌아가질 거절, 다른 80명과 함께 인도로 갔다. 2년 후 그는 「브라질」로 갈 것을 결심, 동료 50명과 함께 「리오 데 자네이로」에 도착 우선 식당에 청소부로 취직했다.
낮에는 청소부로, 밤에는 야간학원을 다녀 「브라질」말을 배워 1년 후에는 주립공업고등학교기계과 속성 코스를 마쳐 「브라질」의 「싱거·미싱」회사에 취직했다.
그 후 자동차 부속제조 공장, 전기 기구회사 등에서 3년 동안 일을 했지만, 남의 밑에서 고용살이만 할 것이 아니라 자립해서 조그마한 공장을 차리기로 결심, 동업할 자본가를 찾아다녔다.

<자본없어 동분서주>
그러나 낮선 외국 땅에서 자본가를 찾기란 그리 용의한 일이 아니었고, 또 그의 기술을 액면 그대로 믿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현재의 동업자인 「호세·군트겡」씨를 만나 그의 도움으로 남의 상점 한 구석에 셋방을 빌어 오늘의 「수아비스」공구제작회사의 간판을 내걸게 되었다.
그러나 조그마한 그의 작업실과 낡은 기계를 보고는 어느 누구 하나 선뜻 일을 맡기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착수금을 먼저 받지 않고 납품한 후에야 후불로 받았고 큰 기계가 필요한 것은 밤을 새워 남의 공장에 가서 빌어 썼다.
각고의 노력 끝에 그는 6개월 후 새 기계를 사게 되었고, 그 후부터는 자동차생산공장에서 쓰는 부속품을 제작하게 되었고 검사가 까다롭기로 유명한 독일계의 「폴크스바겐」자동차공자에 납품하는데 성공했다. 이때부터 이씨의 공장제품은 자동차 업계에서 신용을 얻게 되었고 종업원도 20명이 넘어 24시간 가동을 해야만 했다.

<참전용사 도움 받고>
그러나 일의 주문이 살도하게 되자 운영자금이 달리게 되어 은행융자가 필요했지만, 은행문턱이 그렇게 낮은 것은 아니었다. 주문품에 대한 재료비와 종업원 급료로 당장 2만 달러가 필요했지만, 구할 길이 막연했다.
다행히 한국전쟁 당시 「프랑스」군 대위로 근무하다가 지금은 「상파울루」시할인은행의 지점장이 된 「카롤로스·드·몽」씨를 만났다. 그의 주선으로 융자를 받게 되어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다.
세계 굴지의 자동차 「메이커」인 GM, 「포드」, 「벤츠」, 「싴카」, FNM 등에 공구와 부속품을 납품하게 되었고 품질과 납품기일의 엄수로 일약 자동차업계의 총아로 등장케 되었다.

<꿈은 제일 큰 회사>
특히 「포드」회사에서 69년형으로 생산하기 시작한 「코르셀」승용차의 부속품 중에는 이씨의 고안부속이 들어가 있어 이씨의 공양 없이는 「코르셀」차의 생산이 불가능할 정도라 한다.
67년 2월에 준공된 이씨의 새 공장은 대지1만1천평에 건명4천평이 넘는 작업장이 들어서 있고 준공식 날에는 이곳 「준디아이」시장을 비롯, 고위관리들과 자동차회사의 사장들이 다수 참석했던 것으로 보아 이씨가 자동차 업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모든 일을 순리를 따라서 원리원칙대로 하는 것』이 자신의 사업신조라고 밝힌 이씨는 앞으로 남미에서 제일 큰 자동차 공구제작회사를 꾸미는 것이 자신의 희망이라면서 내년쯤엔 그리던 고국을 방문하여 국내 실업인들을 만나고 싶으며, 6·25때 월남한 두 형님도 찾아보겠다고 그의 포부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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