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나는『희망』을 선택했다|소작가「쿠즈네초프」망명의 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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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소련청년잡지「유스티」의 편집위원으로서 현정권의 신임을 받아온 작가「아나톨리·쿠즈네초프」가 지난 30일 영국에 망명했다. 그는 다음글에서 자신이 망명하지 않을 수 없었던 절망적인 상황을 밝히고 있다.<편집자주>
자기작품이 수백만부씩이나 팔리고 국내에서의 생활수준도 상당히 높은 작가가 왜 갑자기 사랑하는 조국을 버리고 망명길을 택했을까? 모두들 이해하기 힘들다고 말할 것이다.
이에 대한 나의 해답은 희망의 상실이다. 나는 이 이상 그곳에서 살수 없었던 것이다. 만약 내가 지금 소련으로 돌아간다면 미치고 말것이다.
내가 만일 작가가 아니었다면 견딜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작가였으므로 그럴수가 없었다. 나는 작품을 쓰고 있는 동안만은 나의 생애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다는 환상을 가질수가 있으며, 작품을 쓰지 않는다는 것은 물고기가 헤엄을 치지 않는 것과 같은 뜻을 갖는 것이다.
나는 지난 25년 동안을 작품활동에 받쳐왔다. 그러나 그 동안에 내가 쓴 원고대로 소련안에서 인쇄된 작품은 하나도 없다.
검열당국과 편집자들은 정치적 이유를 앞세워 나의 작품을 끊어내고 왜곡시키고 유린하여 결국 못 알아볼 정도로 만들어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작품이 발표된다는 사실은 나에게 슬픔을 안겨다 주었다. 추하고 허위에 가득찬 나의 새책이 나올때마다 나는 수치스러워서 사람들을 바로 쳐다 볼수가 없었다.
최근작품인『불꽃』을 쓸 때 나의 심장에는 감각이 없었으며, 신념도 희망도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작품을 쓰기도 전에 이 작품이 무자비한 난도질을 거쳐서 사상의 잡탕이 되어 버릴 것을 먼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내가 느끼는 대로 나의 신념에 맞게 쓴 작품들을 빈병에 넣어 땅속에 묻었다.
지금부터 나의 이름은「A·아나톨리」이다. 지금까지「쿠즈네초프」의 이름으로 쓰여져 발표된 모든 작품에 대해 나는 포기선언을 한다.「쿠즈네초프」는 부정직하고 비굴하며 무턱대고 체제에 적응한 작가이다. 나는 이 이름을 폐기한다.
이제 나는「쿠즈네초프」가 아닌 희망을 가진 새로운 작가가 되었다. 나는 이게 소련작가도 서구작가도 아닌 20세기 지구상에 살고 있는 하나의 작가로서 활동할 것이다. 그뿐 아니라 나는 이 광기에 사로잡힌 세상의 난폭한 삶속에서 인류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대열에 끼어들기 위해 절망적인 노력을 한 작가로서 활동할 것이다.<타임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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