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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영희의 사소한 취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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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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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감수성이 말랑말랑한 시기에 만난 어떤 작품은 인생을 바꿔놓기도 한다. 한국의 만화가나 애니메이션 감독들에게 일본 만화 『아키라(AKIRA)』는 그런 작품인 모양이다. 일본 문화가 개방되기 전인 1980~90년대 다양한 해적판으로 선을 보였던 이 만화가 최근 정식으로 발간되었다는 소식에 예술가들이 저마다의 추억을 뜨겁게 풀어놓는다. “스무 살 때 받은 충격의 여진이 아직 고스란히 살아 있는 만화”(만화가 윤태호), “그림 한 귀퉁이를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흥분했고, 다른 모든 만화가 시시해졌다”(만화가 최규석), “아키라는 내 꿈의 시작이었다”(애니메이션 감독 연상호) 등등.

만화 『아키라』 1권 표지. [사진 세미콜론]

 『아키라』(세미콜론에서 6권으로 발행)는 오토모 가쓰히로(59)가 82년부터 90년까지 일본 소년잡지 ‘영 매거진’에 연재한 만화다. 제3차 세계대전 후 폐허가 된 일본 도쿄가 배경. 아키라는 과학자들의 인체개조 실험으로 세계를 멸망시킬 수 있는 힘을 갖게 된 소년이다. 그를 차지하려는 집단들의 갈등, 인간의 파괴적인 욕망이 만들어낸 디스토피아를 그린다. 세계 35개국에서 출간돼 1350만 부 이상 판매됐는데, 작가가 쉽게 허락을 하지 않아 한국에서는 정식 발간이 늦어졌다. 저자가 직접 각본과 감독을 맡은 동명의 애니메이션(88년) 역시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한국에서도 ‘캡틴 파워’ ‘폭풍소년’ 등의 제목으로 개봉했다가 ‘어둠의 경로’를 통해 퍼져나갔다.

 인생을 바꿔놓을 만큼은 아니었지만 재수생 시절 학원 앞 만화방에서 처음 본 『아키라』의 충격은 꽤 컸다. 스무 살 인근의 열패감이 만화 속 인물들의 어두운 폭주와 만나 마음을 휘저었다. 무엇보다 그림이 압도적이었다. 세밀화처럼 한 컷 한 컷 정교하게 그려진 도시의 풍경. 깨진 파편 조각 하나까지 이토록 생생하게 그리려면 얼마나 오랜 시간 책상에 붙어 앉아 종이를 노려봐야 할까, 생각하다 뜬금없이 ‘공부 열심히 하자’ 다짐했던 기억.

 새로 발간된 만화를 다시 펼쳐봐도 감탄뿐이다. 스토리와 작화 방식 모두에서 만화계의 흐름을 바꿨다고 평가되는 만큼, 이후 작품들에 끼친 영향을 발견하는 것도 새로운 재미다. 『아키라』의 풍뎅이 로봇 경비대는 올해 개봉한 할리우드 SF영화 ‘오블리비언’에 등장하는 정찰 로봇과 놀랍게 닮아있지 않은가. 세기말적 분위기와 신흥종교의 유행이라는 설정 등은 우라사와 나오키의 대작 『20세기 소년』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영화감독 이해영씨의 말처럼 “‘선구적인 깃발을 꽂는 작품’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