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고건의 공인 50년<102> 네거티브 선거, 그리고 승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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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5월 28일 서울시장 후보 TV 토론회를 시작하기 전 현장을 점검하고 있는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고건 후보(왼쪽부터)와 MBC 엄기영 보도제작국장, 국민회의 정동영·김한길 의원. 두 의원은 선거 홍보와 기획을 맡았다. [사진 고건 전 총리]

서울시장 선거를 한 달 앞둔 1998년 5월 선거대책위원회 사무실이 김대중 대통령의 대선 캠프였던 여의도동 대하빌딩에 설치됐다. 당 사람들이 캠프로 몰려들었다. 2개 층을 사무실로 썼지만 사람이 너무 많아 그곳에서 일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임채정 새정치국민회의 의원이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았다. 김대중 대통령은 나에게 세 사람을 보냈다. 김한길·정동영 의원과 신계륜 전 의원이었다. 김 의원과 정 의원은 기획과 홍보를 맡았다. 신 전 의원은 후보 비서실장으로 일했다. 이들은 나에게 많은 도움을 줬다. 양복 겉옷을 벗어 어깨에 걸치고 찍은 포스터 사진은 정 의원의 작품이었다. 내게 생소하기만 했던 TV 토론회를 무사히 치르는 데 김 의원과 정 의원의 조력이 컸다.

 여당인 국민회의도, 야당인 한나라당도 서울시장 선거를 두고 총력전을 펼쳤다. 여소야대 상황이었고 대선을 치른 지 6개월이 채 지나지 않았다. 여당에겐 더 없이 중요한 선거였다. 대선에서 패한 한나라당으로서도 더 이상은 물러설 수 없다는 위기감이 팽배했다.

1998년 서울시장 선거 때 새정치국민회의 고건 후보의 포스터. [중앙포토]

 선거전은 점점 치열해졌고 내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네거티브 선거의 등장이었다. 한나라당 최병렬 서울시장 후보는 ‘고건의 7대 불가사의’를 들고 나왔다. 시장 후보에게 허용되는 신문 광고 횟수는 제한돼 있다. 그런데 최 후보 측은 정책이 아닌 ‘고건의 7대 불가사의’를 신문 광고에 집중적으로 실었다. 핵심은 내 병역 문제였다.

 나는 병역이나 입영을 기피한 적이 없다. 1960년 3월 대학을 졸업하고 1961년 12월 고등고시에 합격했다. 그 후 군에 입대하려고 입영 영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4·19와 5·16으로 병역 기피자들이 한꺼번에 군에 입대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군사정부에서 공무원과 공기업 직원 가운데 병역 기피자를 색출해서 내쫓았기 때문이었다. 입대하는 사람이 갑자기 늘면서 내 또래의 입영 대기자 35만 명 가운데 절반인 17만 명에게 입영 영장이 나오지 않았다. 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내가 병역을 기피하려고 했거나 병역상의 하자가 있었다면 나는 공무원으로 임용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일은 없었다. 영장은 계속 나오지 않았고 1962년 10월 병역법 개정법률 1163호에 따라 나는 보충역으로 편입됐다.

 서울시장 선거를 앞둔 1998년 5월 야당 의원들의 요구로 국회 국방위원회는 나의 병역 기록을 열람했고 영장이 발부되지 않은 ‘영장 미하령’ 상황이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나는 7가지 의혹이 사실이 아니란 점을 설명하고 시정 구상을 유권자에게 소개하려는 노력을 계속했다. 하지만 네거티브 캠페인에 묻혀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했다. 선거일이 가까워져 올수록 네거티브 선거는 심해졌다. 결국 나는 최 후보측을 검찰에 고발하는 강수를 쓸 수밖에 없었다. 선거 끝난 후 화해 차원에서 고소를 취하했다. 5년 후 총리 인준 때 이 내용이 다시 문제가 됐다. 네거티브 캠페인에 대해선 법률적인 결론을 분명히 내렸어야 했다. 후회가 됐다.

 네거티브 선거는 최근 더 심해졌다. 검증의 한 방법이라며 ‘네거티브 옹호론’도 나오지만 난 동의하지 않는다. 사실을 바탕으로 한 검증과 네거티브 선거는 엄연히 다르다.

 1998년 6월 4일 나는 53.5% 득표율로 제31대 서울시장에 당선됐다. 44.0%를 득표한 최병렬 후보와 33만 표 차이었다. 네거티브 선거는 혹독했지만 극복해냈다. 나는 7년6개월여 만에 서울시로 돌아왔다.

정리=조현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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