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승객이 전한 사고 당시 상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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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다섯 식구가 나섰던 미국 여행길. 하지만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뻔한 여행을 회상하며 한보은(여)씨 가족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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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전 11시24분=창문 밖으로 비행기가 낮게 날며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을 지나쳤다가 다시 돌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기장의 설명은 없었지만 ‘별일 아니겠거니’ 했다. “착륙 준비 중”이라는 안내방송에 창밖을 보고 있는데 ‘활주로 옆 바다가 너무 가깝다’는 느낌이 들었다.

 ▶ 오전 11시27분=‘착륙 속도가 너무 빠른 것 아닌가…’ 생각하는 순간. ‘쿵’ 하고 둔탁한 굉음이 들렸다. 분명 바퀴가 활주로에 닿는 소리는 아니었다. 동시에 기체가 좌우로 사정없이 흔들렸다. 안전벨트를 매지 않았더라면 좌석 밖으로 튕겨나갈 정도였다. 이어 기내의 온갖 짐이 머리 위로 떨어졌다. ‘상황이 심각하구나. 무슨 일이 나긴 났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안전하게 착륙했으니 걱정하지 마시고 자리를 이탈하지 말라”는 방송이 나왔다.

 ▶ 오전 11시28분=숨을 쉴 수 없을 만큼 자욱한 흰색 연기가 기내를 덮기 시작했고, 좌석마다 산소마스크가 아래로 떨어졌다. 금방이라도 비행기가 폭발할 것 같은 공포가 밀려왔다. 그때 기장의 다급한 안내방송이 나왔다. “비상 탈출! 비상 탈출!”

 ▶ 오전 11시30분=비행기는 완전히 멈췄고 비상구가 열렸다. 안전벨트를 풀자 사람들이 탈출을 하려고 소리를 지르며 비상구 쪽으로 정신없이 몰리기 시작했다. 비상구로 달려가는 동안 자욱한 연기 사이로 머리에 피를 흘리고 앉아 있는 사람들, 가족의 이름을 부르며 우는 사람 등 아비규환이었다.

 ▶ 오전 11시31분=비상구에 다다랐다. 비행기가 비상 착륙했을 때 펴지는 것으로 알고 있던 슬라이드는 없었다(좌측 2개의 비상구에서는 슬라이드가 펼쳐졌다). 그냥 뛰어내려야 하는 상황. 기체가 높아 우리는 승무원들의 안내에 따라 부러진 비행기 날개의 틈 사이로 뛰어내렸다. 기체에서는 하얀색 거품의 기름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불이 옮겨붙거나 폭발할까 봐 최대한 비행기에서 먼 곳을 향해 뛰었다.

 ▶ 오전 11시 35분=200m 이상 달린 후 뒤돌아보니 기체 반대편 쪽 날개 부분에서 시커먼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고 소방차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조금 있으니 기체 우측으로부터 불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 오전 11시45분=탈출한 승객들은 활주로 옆 잔디밭 등에 모여 소방관들의 지시에 따랐다. 소방관들은 다친 사람들을 찾아 앰뷸런스로 옮겼다. 다치지 않은 사람들은 땅바닥에 앉아 후속조치를 기다렸다. 이후 불길이 점점 커지더니 비행기 천장 부위를 모두 태웠다. 이후 약 2시간여를 그 자리에서 대기했다.

 ▶ 오후 1시30분=공항에 마련된 탑승객 가족 대기실. 비교적 경미한 부상을 입어 병원 이송이 불필요한 일부 탑승객이 대기실로 하나 둘씩 들어왔다. 제일 먼저 대기실에 들어온 스탠퍼드대 김영훈(43·팰로앨토) 교수는 맨발이었다. 그 역시 “랜딩기어가 나오는 소리가 들렸고 착륙한다고 생각했는데, 속도가 너무 빠른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병원으로 이송된 승객들을 제외한 나머지 승객들이 두 대기실로 나뉘어 보내졌다. 구토와 오한으로 집에 가고 싶다고 하소연했지만 공항 관계자들과 경찰 측은 “테러일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어 FBI의 조사가 끝난 뒤 귀가할 수 있다”고 말했다. 대기실에는 샌프란시스코 구세군 상항한인교회 오관근 사관 내외를 비롯한 구세군 관계자들이 승객들이 기다리는 동안 담요를 나눠주고 통역을 담당했다. 대기실로 들어온 탑승객들은 연방수사국(FBI)의 조사를 받기 위해 하나 둘씩 불려나갔다.

 ▶ 오후 5시=FBI 관계자들이 대기실의 가족들을 탑승객들이 있는 또 다른 대기실로 모두 이동시켰다.

 ▶ 오후 6시=가족들은 유나이티드 클럽 라운지에서 만났다. 대기한 지 5시간여 만이었다. 병원으로 이송돼 X선 사진을 찍고 있는 아내를 찾아가지도 못하고 긴 시간 초등학생 두 딸을 기다렸던 강병구씨는 “가족들이 무사한 것만으로 감사하다”며 딸들을 얼싸안고 눈시울을 붉혔다. 물 한 모금 안 마시고 5시간을 기다린 70대 노모도 중년 아들의 안고 얼굴을 쓰다듬으며 “아이고 내 새끼”를 연발했다.

 ▶ 오후 6시30분=탑승객들과 가족들이 공항 관계자들의 안내에 따라 취재진을 피해 국내선 출구로 나가 귀가했다.

샌프란시스코 지사=황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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