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괜한 오해 살까 봐 창업자 추도식 조용히 창립 기념행사 말없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경제 02면

굴지의 대기업에서 회장 비서 업무를 하고 있는 A상무는 요즘 이곳저곳 전화를 돌리느라 바쁘다. 올가을 예정된 이 회사 창업주의 추도식을 어떻게 진행할지 ‘수위 조절’을 하기 어려워 다른 기업 사례를 취합하고 있는 것. 그는 “창업주의 도전정신을 되새긴다는 의미에서 나름 의미 있는 추도식을 구상하고 있는데 세간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고 전했다. 이 회사는 10년 전 정·관계 인사, 창업 원로, 그룹 임원 등 수백 명을 초청해 계열사 호텔에서 창업자 추도식을 치렀다.

 A상무가 말하는 ‘세간의 시선’이란 정치계를 중심으로 경제민주화 입법이 추진되면서 재계가 창업자 또는 오너 경영인에 관계된 행사를 치르기가 눈치가 보인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대기업들은 최근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사회공헌활동 확대 등 ‘착한 기업’과 관련한 이슈를 경쟁하듯 발표하고 있지만 창립 기념행사, 신경영 선포 기념 등은 조용히 넘어가는 분위기다.

 다음 달 4일 고(故) 정몽헌(1948~2003) 회장 10주기를 맞는 현대그룹은 당초 남북 당국 간 실무 회담이 성공적으로 성사됐을 경우 금강산에서 추모 행사를 할 것을 구상했었다. 금강산 관광이 재개되는 것을 가정한 것이었지만 회담 자체가 무산되면서 ‘금강산 추도식’은 없었던 일이 돼 버렸다. 현대그룹은 지난해 고 정 회장의 9주기를 맞아 금강산을 찾아 시설물이나 도로 등을 점검하기도 했다. 이 회사는 경기도 하남시 창우리에 있는 고 정 회장의 선영을 참배하는 수준에서 추도식을 진행할 계획이다.

 두산그룹 역시 다음 달 예정인 고 박두병(1910~73) 초대 회장의 40주기를 가족 행사로 치르기로 했다. 두산은 2003년 8월 서울 명동성당과 경기도 광주의 선영에서 각계 인사와 그룹 전·현직 임직원 400여 명이 참석해 추모식을 한 바 있다.

 올 11월 예정인 SK그룹의 창업주인 고 최종건(1926~73) 회장 추도식 역시 조촐하게 치러질 전망이다. SKC 관계자는 “창업 원로를 모신다는 계획만 정해졌을 뿐 추도식에 대한 구체적인 일정이나 규모는 아직 정해진 것이 없다”고 전했다. 재계 관계자는 이 같은 조용한 움직임에 대해 “경기 불황 등으로 재계가 활력을 잃은 탓도 있겠지만 최근 경제민주화 분위기에 주눅이 든 것이 더 큰 이유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상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