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고건의 공인 50년<97> 2004년 KTX 개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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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2004년 3월 30일 서울역에서 열린 경부고속철도 개통식에서 고건 대통령 권한대행(오른쪽)이 박수를 치고 있다. [중앙포토]

2004년 3월 30일 오전 서울역 광장. 고속철도(KTX) 개통식이 열렸다. 12년간 3만 명의 인원과 20조원의 자금을 투자한 대역사였다. 국무총리이자 대통령 권한대행이었던 나는 목포행 KTX 열차에 올랐다. ‘웅’ 낮은 소리를 내며 열차가 서울역을 출발했다.

 요란했던 개통 행사와 촬영, 기자회견이 끝났다. KTX 의자에 몸을 기댔다. 서울시장 때 타봤던 런던~파리 구간 유로스타의 승차감, 안락함과 비교해 손색이 없었다. 30분이 채 지나기 전 열차는 빠른 속도로 천안아산역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7년 전 일이 기억 났다.

 1997년 4월 세계적 안전진단기업인 미국 WJE는 경부고속철도 1차 공구인 서울~천안, 천안~대전 구간의 철도·교량·터널 등 1012개 구조물의 70%가 부실 시공됐다는 발표를 했다. 한국고속철도건설공단이 정밀안전점검을 의뢰한 결과였다. 설계부터 시공, 감리까지 총체적 부실이었다. 2002년 개통한다는 목표에 차질이 생겼을 뿐만 아니라 5조원으로 계획했던 공사비가 30조원으로 불어난다는 분석이 나왔다.

 연이은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부실공사에 대한 국민의 공포감은 극에 달했던 시기다. 경기 침체 때문에 세금 낭비라는 비판까지 받았다. 고속철도 반대론이 비등했다.

 그런데 착공 후 지금까지 투자한 막대한 세금이 문제였다. 매몰 비용으로 처리하기엔 너무 큰 액수였다. 대통령 선거를 6개월여 앞두고 고속철도 공사를 포기하느냐 마느냐가 국가적 고민으로 부상했다. 공사 초기부터 갈렸던 고속철도 반대론과 찬성론이 다시 팽팽하게 맞섰다.

 김영삼 대통령은 한보 사태에 집중하고 있었다. 총리인 나에게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과제가 맡겨졌다. 교통부 장관을 할 때의 경험을 살렸다. 토목공학, 교통정책, 재정 등 전문가를 서울 삼청동 총리공관에 초청해 간담회를 열었다. 토론 결과를 바탕으로 찬성론자, 반대론자 그리고 중립적 전문가가 참여하는 조사위원회를 구성했다.

부실공사에 대한 조사 결과, 보완공사 가능성 판단, 공사 계속 여부 등을 가지고 총리 주재 위원회 회의에서 난상토론이 벌어졌다. 공사를 계속 추진하되 사업계획을 대폭 보완한다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그리고 9월 9일 건설교통부·고속철도건설공단·교통개발연구원은 경부고속철도 서울~대구 구간은 2003년 7월 개통하고 부산까지는 기존 경부선을 활용해 일단 사용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서울~부산 간 완전 개통 시기는 2005년 11월로 늦춰졌다. 89년 기준 5조8000억원이었던 사업비는 97년 1월 기준 17조6300억원으로 늘어났다. 공사비가 세 배 이상으로 늘어난다는 데 대한 비판은 감수해야 했다.

 고속철도와 얽힌 사연은 또 있다. 2003년 경부고속철도 천성산 구간이 문제가 돼 공사가 중단됐다. 두 번째 총리 시절 국정현안정책조정회의를 통해 문제를 돌파했다. 2003년 9월 19일 총리 주재 국정현안정책조정회의에서 예정대로 천성산 구간 공사를 진행한다고 결론을 냈다.

 다음 해 KTX 경부선보다 호남선 구간이 먼저 완공됐다. 내가 교통부 장관이었던 시절 호남선 복선화 공사를 하면서 곡선이던 구간을 직선으로 만들었던 게 도움이 됐다.

단군 이래 최대의 토목사업이라던 고속철도 공사가 중단될 뻔한 위기를 극복한 것은 공론화 과정을 거친 사회적 합의가 있어서였다.

공론화 과정과 국민적 합의가 바로 소통이다. 고속철도 개통식에서 내 감회가 남달랐던 이유다. 하지만 우리 좁은 국토에서 KTX가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려면 북한을 거쳐 중국 대륙과 시베리아 대륙을 거쳐 유럽과 연결이 되는 ‘철의 실크로드’가 완성돼야 할 것이다.

정리=조현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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