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2) 영농자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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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흔히들 농촌에서는 영농자금이 막걸리 자금이라고 불리어진다. 농민들이, 농사를 짓는데 보탬이 되라고 농협이 융자해 준 돈을 막걸리 값으로 먹어 치운다는 데서 붙은 별명이리라. 농민들은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 애써 융자받은 돈이 막걸리를 사마실 정도의 돈밖에 되지 않는다는 슬픈 현실을 이렇게 표현했는지도 모른다. 몇푼 안되는 돈을 손에 쥐면 우선 급한대로 농사자금 보다도 입에 풀칠하게 마련이고, 막걸리 한잔에 거나하게 취해 피로한 자신의 운명을 잊으려고 하는 농민들의 마음에 수긍이 가기도 한다.
영농자금이 쓰여질 곳에 쓰이지 않고 이처럼 먹어치우는데 낭비(?) 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이는 과거에 중점 융자가 아니고 분배식 융자라는 방법으로 인해 영농자금이 자기의 목적에 쓰여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이래서 농협이 농민을 위해 존재하는 진정한 기관이 되지 못했다는 지난날의 비난이 일어났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영세 농민들이 영농자금을 농사자금으로 써서 수확기에 이 자금을 배로 늘려 농협에 갚는 것이 아니라 이렇듯 막걸리 값이나 생계 자금으로 탕진해 버림으로써 오히려 영농자금은 수확기에 가서 농민의 부담이 되어온 예가 과거에 허다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농협이 이처럼 때묻은 과거를 씻고 농민을 위한 농협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우선 농협이 농촌근대화에 맞도록 체질을 개선해야만 하겠다. 농협직원의 농촌생활에 맞지 않는 사치성도 근절해야겠고 농촌과 농민을, 그 현실에 파고들어 직접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농민이 농민을 위한 유일한 금융기관인 농협을 소외시한 원인이었던 것이다. 영농자금의 융자방식도 바꾸어야 하겠다. 종전의 융자수속서류 17가지를 5, 6가지로 줄여 간소화하고 2만원 이하의 자금은 비료 등 현물로 지급하는 등의 분배방식을 써 영농자금의 소비자금화를 막아야만 하겠다. 이렇게 할때 농협은 농민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나 농민을 위해 유용한 금융기관이 되어 제구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서봉균<농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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