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중앙시평

통합형 정보기관, 이젠 재고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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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문정인
연세대 교수·정치외교학

국가정보원에 대해 필자는 큰 애착을 갖고 있었다. 한때 정권안보의 시녀 노릇을 했다는 이유 때문에 국가안보의 첨병으로서 국정원이 가진 고유의 가치가 무시돼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몸담고 있는 학교에 ‘국가정보론’이라는 과목을 국내 최초로 개설하고 1990년대 중반 ‘국가정보연구회’라는 학술모임을 만들어 국가정보학 교과서도 냈다. 참여정부 초기 청와대 국정원개혁위원회 위원장직에 위촉된 것도 이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당시 대통령의 개혁 지침은 분명했다. 국정원이 더 이상 권력기관으로 국내 정치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근본적인 시스템을 만들라는 것이었다. 위원으로 참가한 청와대 시민사회수석과 민정수석은 미국, 영국 등 선진국처럼 해외 및 대북 정보 기능과 국내 보안 기능을 분리하자고 주장했다. 그래야 국정원의 정치개입을 구조적으로 막을 수 있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필자와 안보부서를 대표하는 위원들은 세계화·정보화 시대의 국가정보는 안과 밖을 구분하기 어렵고, 해외와 국내로 분리하면 오히려 두 개의 공룡조직이 출현할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더욱이 9·11사태 이후 전 세계 정보기관들이 해외정보와 국내보안 기능을 통합하려는 추세인데 애써 만들어놓은 통합형 정보기관을 쪼갤 필요가 있는가라는 이유를 들었다. 결국 통합형 국정원을 유지하되 대폭적 개혁을 단행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 방안을 수용하긴 했지만 대신 국정원의 권력화를 막을 여러 조치를 취했다. 우선 대통령과 국정원장의 독대 관행을 폐지하고 국내 정보는 청와대 국정상황실을 통해, 대북 및 해외 정보는 국가안보실을 통해 보고토록 했다. 국정원장에 ‘실세’와는 거리가 먼 ‘법을 잘 지킬 사람’을 임명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법조인 출신인 고영구, 김승규 원장이 발탁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노 대통령의 처방은 주효했다. 국정원의 ‘힘’은 대폭 빠졌고 국내 정치개입 악습도 두드러지게 사라졌다.

 그러나 지금 회고해보면 노 대통령이 옳았다. 그때 분리형으로 갔어야 했다. 이명박정부 5년간 국정원이 얼마나 망가졌는가가 그 방증이다. 정권에 비판적인 시민들을 종북세력으로 규정해 심리전 공작을 전개하고, 전직 대통령이 세상을 떠나자 직원들을 시켜 고인을 비하하는 댓글을 무더기로 유포하는 기관을 어찌 ‘국가정보기관’이라 할 수 있겠는가.

어디 그뿐인가. 검찰이 선거법과 국정원법 위반으로 원세훈 전 원장을 기소하는 과정에서 국정원이 각종 선거에 깊숙이 개입했다는 정황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국가안보와 정권안보를 구분하지 못하고 지켜야 할 헌정질서를 스스로 농단하는 국가 최고 정보기관의 모습은 배신감 그 자체다. 21세기 ‘민주’ 대한민국에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 파문도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정상회담 기록은 통상 1급비밀로 분류돼 영구보존하는 게 상례다. 이를 2급비밀로 분류하는 것도 모자라 일반문서로 재분류해 여당 의원들에게 공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국정원은 합당한 절차를 밟았다고 주장하나 그렇다면 애초에 대화록을 비밀로 지정하는 목적이 무엇이란 말인가.

정보기관의 임무는 비밀정보를 수집, 분석, 생산해 이를 지키는 것이다. ‘기관의 명예’나 ‘정치적 상황’을 이유로 이를 공개한다는 건 어느 모로 보아도 정당화될 수 없다. 국정원은 정치적 판단을 내리거나 정책을 수립, 집행, 홍보하는 부서가 아니다. 그건 대통령의 몫이다.

 이쯤 되면 통합형 정보기관으로서의 국정원은 재고돼야 한다. 정치공작이나 하는 국정원을 누가 국가안보의 대들보로 믿고 따르겠는가. 거듭나야 한다. 대북 및 해외 정보, 외사방첩, 과학기술 정보를 제외하고 국내 정치개입의 소지가 있는 조직은 모두 과감히 정리해야 한다.

단순한 이미지 개선용 개혁으로는 그 부작용과 적폐를 들어내기 어렵고, 정보기관 고유의 기능을 되살리기도 어려울 것이다. 대통령 측근을 정보기관 수장으로 임명하는 관행도 버려야 한다. 전문가 원장에게 임기제로 업무 독립성을 보장해 주어야 길이 열린다.

 이제 박근혜 대통령은 국정원을 과감히 개혁해야 한다. 그것만이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지는 촛불의 함성을 막고 무거운 정치적 책임에서 벗어날 유일한 기회다. 또한 그것만이 이 나라의 안보를 살리는 길이기도 하다.

문정인 연세대 교수·정치외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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