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반항」은 어디서|미 보스턴대 「멜빈」교수의 학원소동비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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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전체주의의 오랜 암흑시대를 거쳐서 개인주의 및 인간의 자유의 부활을 목표로 싸운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고서도 대망의 황금시대는 좀처럼 오지않았다. 그원인은 개인주의의 시대가 훨씬 오랜 옛날에 지나가고, 더우기 그것이「이데올로기」의 탓이 아니며, 오히려 과학기술의 진보를 위한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무엇을 믿든 그것은 인간의 자유이지만 과학기술의 발달은 그것을짓밟아 버리기가 일쑤였다.
우리들은 「이데올로기」의 말기를 통과했다. 복지사회는 좌익의 교양에서 탄생된것도, 또 우익의 교양에서 탄생된것도 아니다. 그것은 다만 풍부한 경제로부터 생겨난것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의 젊은이들의 항의는 그들이 현재 즐겨서 ?시하는 사회의 은혜를 상당히 받고 있다는 사실을 감쪽같이 잊고 있음을 표시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특히 대학생들은 아직도 어린애들이나 직업을 갖고있기 않다.
이같은 2대 「안정요소」는 급기야 학원이 그들을 그것으로부터 보호해 주고있다는 인생의 냉엄한 사실을 그들에게 가르쳐 즐것이 틀림없다.
현재로서는 그들에게 복종을 강요하는 「가장적존재」의 필요성을 전혀 인정치않고 있는 그들도 언젠가는 스스로 나서서 그 지배하에 들어선다.
사회적인간의 순응방식은 지금까지 여러가지로 관찰되어 왔는데 그에 관한 최초의 중요한 책이 나온것은 겨우 19세기의 중엽이었다. 그중에서도 「토크빌」의 미국민주주의에 관한 고전적 연구는 그 현상을 명쾌하게 설명하고있다.
『자유와 질서라는 영원한 문제는 사회정의의 균형위에 서서 처리되어야만한다.』 그러나 대학에서 이야기되고 있는것을 들으면 삶의 가치가 있는 유일한 인생은 절대로 타인이 말하는 것을 듣지않는 개인주의의 인생이다. 여기에만이 인간의 주체성과 본래의 자세가 있다는 식인 것이다.
그러나 사회의 은헤를 가장 많이 받고 있는것은 이들 대학의 젊은이들인것이다.
그들이 수업료나 식비, 하숙비 등을 얼마만큼 지불하고 있다고 해도 납세자와 자선단체가 현실적으로 부담하고 있는 액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미국의 고교교육에서 학생1인당 1년간의 직접경비는 연구및 그외의 보조적 경비를 제외하고 약1천3백「달러」이다.
한편 대학졸업생은 고교졸업생에 비해 일생중 평균18만「달러」를 더 벌고 있는것이다.
그러나 일단 학원내 항의운동의 이해할 수 없는 움직임에 접촉하면 『혁신』을 부르며 무엇에든지 덤벼들기가 일쑤이다.
이같이 자승자박의 결과를 낳는것은 「캘리포니아」대학이 그결정이었으나 대학생활의 하나의 유형으로서의 학원소동은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대학은 각각 다른 생각을 지닌 사람들의 집단인것이며 학생들이 「학문의 정신」을 구제하기 위해서 제멋대로의 항의를 발명하는 장소는 아니다.
이같은 견해에서 보면 사회를 소란케 하고 최면술을 걸고 무리하게 보조를 맞추게 할 필요는 없다. 보조를 맞추는 것 자체가 더 중요한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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