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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거란 사이 능란한 줄타기로 영토 확장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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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9호 26면

993년(성종12) 거란 장수 소손녕은 두 가지 이유로 고려를 정벌한다고 했다. 첫째, 신라 땅에서 일어난(신라를 계승한) 고려가 거란의 영토인 고구려 지역을 잠식했다. 둘째, 국경을 접한 거란 대신 송나라와 관계를 맺었다.

고려사의 재발견 성종ㆍ현종의 실리외교

고려의 서희는 첫째 이유에 대해 “고려는 고구려의 옛 땅에서 건국됐다. 국호를 고려라 하고 평양을 도읍으로 삼았다. 거란의 동경 땅도 고구려 땅으로 원래 우리의 영토다(고구려 계승론)”라고 반박한다. 둘째 이유에 대해서도 “고려가 거란과 외교관계를 맺지 않은 건 압록강 주변을 여진족이 차지해 거란으로 가는 길목이 차단됐기 때문이다. 여진을 쫓고 그곳을 우리 영토로 인정하면 거란과 관계를 맺을 것이다(압록강 영유론)”라고 답변한다. (『고려사』 권94 서희 열전).

서울 낙성대에 있는 강감찬(948~1031) 장군의 영정. 70세 때인 1018년 고려를 침공한 거란 10만 대군을 이듬해 2월 궤멸시키고 대승을 거뒀다.

소손녕의 본심은 무엇이며, 그동안 우리나라 역사책은 ‘고구려 계승론’과 ‘압록강 영유론’ 가운데 어느 쪽을 더 강조했을까? ‘고구려 계승론’에 방점을 찍어 서술했다. 통쾌하기조차 한 서희의 ‘고구려 계승론’은 민족의식을 강조한 역사교육에 가장 적절한 소재로 인용돼 왔다. 틀린 말은 아니나 그것만 강조하면 고려와 거란의 전쟁 의미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다.

고려와 송의 관계를 차단한 뒤 고려가 거란과 관계를 맺게 하려는 게 소손녕의 본심, 즉 거란 침입의 목적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그런 의도를 꿰뚫어 보고 ‘압록강 영유론’을 주장해 관철시켰다. 거란과 외교관계를 재개하는 조건으로 압록강 이동 280리 지역을 고려 영토로 확정한 것이다. 고려 실리외교의 전형을 보여준다. 거란과의 전쟁은 고구려 계승론과 같은 민족의식의 경연장이 아니라 국익(國益)이 걸린 영토분쟁이었다.

인류 역사상 전쟁은 대부분 영토분쟁에서 시작된다. 993년(성종12) 거란의 1차 침입에서 1019년(현종10) 강감찬의 귀주대첩까지 30년 가까이 이어진 두 나라 간 전쟁의 본질 역시 영토분쟁이다. 그러나 단순한 영토분쟁은 아니다. 이 전쟁에 대해 영웅 서희와 강감찬의 활동에 초점을 둬온 그동안의 시각에서 벗어나 좀 더 국제적인 시각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거란은 왜 전쟁을 일으켰을까?

고려·거란 30년 전쟁은 결국 땅따먹기
960년 중국에서 송나라가 건국되면서 동아시아 세계는 영토분쟁에 휩싸인다. 거란의 도움으로 후진(後晋·936~946년)을 건국한 석경당(石敬塘)은 지금의 베이징 지역이 포함된 보하이만 이북의 연(燕)· 운(雲) 등 16개 주, 이른바 ‘연운 16주’ 지역을 거란에 양도한다. 송나라는 건국 후 거란에 이 영토의 반환을 요구한다. 거란이 거부하자 979년 송 태종은 거란을 치기 위해 북벌(北伐)에 나선다. 동아시아 영토분쟁의 시작이다. 거란은 송나라와의 전쟁에 앞서 후방 지역의 안정을 위해 983년(성종2)부터 압록강 일대 여진족을 정벌한다. 이어 985년 발해 유민이 세운 정안국(定安國)을 무너뜨린다. 이런 거란의 움직임에 대비해 고려와 송나라는 관계를 강화한다.

“연운 16주는 중국의 땅인데 오랑캐들이 차지했다. 이곳을 오랑캐의 풍속에 빠지게 할 수 없다. 이제 군사를 일으켜 정벌하고자 한다. (고려)왕은 오랫동안 중국 풍속을 사모하고 평소 밝은 계략과 충성스러운 절의로 나라를 다스렸는데, 오랑캐(거란)와 국경을 접해 많은 해를 입었다. 이제 그 분함을 씻을 기회이니 두 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함께 오랑캐를 정벌할 것이다. 좋은 때는 두 번 오지 않으니 함께 도모하기 바란다. 노획한 포로와 소·양·재물 등은 모두 고려 장수와 군사에게 상으로 나누어 주겠다.”(『고려사』 권3 성종 4년 5월)

송나라가 985년(성종4) 신료인 한국화(韓國華)를 고려에 보내 거란 협공을 요청한 외교문서의 내용이다. 송나라는 그 2년 전 고려 성종을 책봉(冊封)했는데, 이번에도 다시 책봉하면서 이같이 요청했다. 책봉은 해당 국왕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시키는 한편, 그 나라를 품에 안으려는 외교 의례다. 즉위 후 한 번의 책봉이 관례인데, 송나라는 이후 세 차례(성종 7, 9, 11년) 더 책봉한다. 다섯 차례의 책봉은 매우 이례적이다. 거란과의 전쟁에 고려를 끌어들이려는 송나라의 다급한 사정이 드러난다. 그러나 고려는 냉정했다. 거란을 외교적으로 압박하려는 목적에서 송과 관계를 맺은 것이지 군사동맹으로 또 다른 화를 자초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고려는 시간을 끌면서 송나라 요구를 거부한다.

서울 낙성대의 강감찬 장군 생가 터에 있던 탑과 강장군을 기리는 사당인 안국사. 조용철 기자

‘천혜 요새’ 강동 6주 넘긴 거란의 패착
여진족과 발해 유민의 정안국을 정벌한 거란은 마침내 993년(성종12) 고려에 침입한다. 송나라를 고립시키고 후방의 안전을 확보해 장차 송나라와의 전쟁(1004년)에서 승리하려는 다목적 노림수가 숨어 있었다. 고려는 송나라와 관계를 끊고 거란과 외교관계를 맺는 대가로 압록강 이동 280리 지역을 확보한다. 고려는 이듬해(994년) 송나라에 거란의 침략을 알리고 군사동맹을 제안한다. 송나라가 거부하자 이를 빌미로 송나라와의 관계를 단절한다. 고려는 압록강 이동 280리 지역에 있는 여진족을 몰아내고 6개 성을 요새화하는 등 압록강까지 영토를 확보한다. 한편 거란은 1004년 송나라를 굴복시키고, 연운 16주 지역을 자국 영토로 확정한다. 전쟁에서 패한 송나라는 해마다 막대한 물품을 거란에 배상하는 치욕을 당한다.

그러나 거란은 압록강 이동 지역을 고려에 넘겨줄 당시만 해도 이 지역이 뒷날 거란에 엄청난 재앙을 안겨줄 것이란 사실은 깨닫지 못한 실책을 저질렀다. 이곳에 설치한 6개의 군사도시인 강동 6주(성)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거란은 997년과 998년 동북(함경도)의 여진족 정벌에 나선다. 지름길은 강동 6주의 서북 지역을 통하는 길인데, 고려에 넘겨준 까닭에 함흥 황초령 등 북방 지역을 우회해 여진을 정벌한다. 길이 멀고 식량이 끊겨 군사와 병마가 많은 피해를 보고 정벌에도 실패한다. 강동 6주는 동북 지역 진출의 교통요지였다. 한편 압록강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오려면 반드시 6주(성)를 거쳐야 한다. 고려는 이곳을 요새화하는데, 거란은 물론 뒷날 몽골군도 이 지역에서 패배해 전력이 반감됐을 만큼 강동 6주는 천혜 요새인 전략 거점이다. 압록강 하류는 산동반도-한반도-일본으로 이어지는 해로의 길목이며, 송나라·여진·고려·거란 사이에 교역이 이루어진 곳이다. 강동 6주(성)는 이곳의 교역을 감시·견제하는 가치를 지닌 곳이다.

강동6주가 교통·군사·경제의 중요한 거점임을 뒤늦게 알게 된 거란은 송과의 전쟁이 끝난 후 고려에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한다. 현종 때 재연된 거란과의 전쟁은 강동 6주의 반환을 둘러싼 또 다른 형태의 영토전쟁이다. 1010년(현종1) 11월 거란은 목종을 폐위한 강조(康兆)의 정변을 구실로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에 침입한다. 현종은 이해 12월 남쪽으로 피란하고, 거란은 이듬해 1월 개경을 점령한다. 고려가 거란에 화의를 요청하자 거란은 국왕이 거란에 가서 항복하는 조건으로 철수한다. 1012년(현종3) 6월 고려는 국왕의 병을 이유로 거란행을 거부한다. 그러자 거란은 “흥화(興化)·통주(通主)·용주(龍州)·철주(鐵州)·곽주(郭州)·구주(龜州) 등 6성을 점령하겠다”며 본심을 드러낸다. 강동 6주의 반환을 관철하는 게 거란 침입의 목적이었던 것이다.

거란이 사신 야율행평(耶律行平)을 여러 차례 보내 6성의 반환을 요구한 데 대해 고려는 1014년(현종5) 거란 사신을 억류하는 강경책을 구사한다. 다른 한편으로 고려는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중단된 외교관계를 재개함으로써 거란을 압박해 그들의 무리한 요구를 막으려는 외교전술을 구사한다. 이해 10월 거란은 6성의 반환을 요구하면서 고려에 침입한다. 거란의 3차 고려 침입이다. 1015년(현종6) 거란은 압록강 동쪽의 요충지 보주(保州·지금의 의주)를 점령한다. 보주 반환을 둘러싸고 두 나라 사이에 독도 영유권 분쟁에 비유할 만한 100년간의 긴 영토분쟁이 시작된다. 이는 뒤에 다루기로 한다.

거란의 保州 점령으로 100년 전쟁 시작
거란의 3차 침입에 다급해진 고려는 1016년(현종7) 곽원(郭元)을 송나라에 보내 도움을 요청한다. 송나라는 고려에 거란과의 화해를 권하면서 고려의 요구를 완곡하게 거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는 이 해 송나라 연호를 사용하면서 거란과의 관계를 단절하는 강경책을 구사한다.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국제질서의 명언을 역사에서 실천한 왕조의 하나는 고려다.

두 나라 사이에 전면전은 불가피했다. 거란은 소배압에게 10만의 군사를 줘 고려를 공격하게 한다. 1018년(현종9) 10월 고려는 강감찬(姜邯贊)을 최고사령관, 강민첨(姜民瞻)을 부사령관으로 삼아 군사 20만8300명을 거느리고 영주(寧州·평남 안주)에 주둔케 하여 마지막 결전에 대비한다. 1019년(현종10) 2월 강감찬은 마침내 거란군을 크게 물리친다.

“2월(1019년) 강감찬이 귀주에서 거란군과 싸웠다. 승패가 나지 않았는데, 부하 김종현이 군사를 이끌고 세를 불리자 군사들이 용기를 내 싸워 거란병을 패주시켰다. 도망가는 거란병을 추격하자 시체가 들판을 덮었다. 사로잡은 사람과 말·낙타·갑옷·무기는 헤아릴 수 없고, 살아 돌아간 자는 불과 수천 명이었다. 거란이 이같이 패한 적은 이전에 없었다. 거란 왕이 소손녕(※소배압의 오기)을 꾸짖기를 ‘네가 적을 무시하고 깊이 들어가 이렇게 패했다. 무슨 면목으로 나를 보겠는가. 마땅히 너의 낯가죽을 벗긴 후 죽일 것이다’라고 했다.”(『고려사』 권94 강감찬 열전)

동아시아 영토분쟁의 파고(波高)는 고려와 거란의 전쟁을 유발했다. 이 전쟁은 국지전이 아니라 국제전쟁의 일부였다. 고려는 군사력과 외교력을 동시에 구사하면서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어갔다. 송과의 관계를 지렛대로 거란을 견제하고 때로는 과감하게 송과 외교관계를 단절해 실리를 챙겼다. 군사적으로 유리한 국면에선 전면전을 통해 거란을 패주시켰다. 국익을 위해 강경노선과 유화노선을 적절하게 배합한 고려의 외교군사전략은 지금도 배울 점이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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