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짓 떠올린 후 'W□□H'를 채우게 하면?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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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에서 미사를 거행할 때 사제가 손을 씻는 의식을 치르는 까닭은 물에 의해 죄악이 씻겨 내려가서 ‘결백하게 된다’(시편 26 : 6)고 여기기 때문이다. 범죄 집단의 굴레에서 빠져나오면 ‘손을 씻었다’고 말한다.

이처럼 물리적 상태를 나타내는 낱말로 추상적 개념을 묘사하는 표현은 한둘이 아니다. 가령 존경하는 인물은 ‘올려다’본다, 과거는 ‘되돌아’본다, 사랑하는 사람은 ‘따뜻하게’ 느껴진다고 표현한다.

이런 사례는 마음이 존경이나 애정 같은 추상적 개념을 이해할 때 몸의 도움을 받는 증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따라서 몸의 감각이나 움직임이 마음의 인지 기능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주장하는 ‘신체화된 인지(embodied cognition)’ 이론이 주목을 받는다.

사람의 마음은 오랫동안 객관적으로 정의될 수 없는 현상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과학적 연구의 주제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컴퓨터가 등장하면서부터 일부 학자가 하드웨어를 사람의 뇌로, 소프트웨어를 마음으로 간주함에 따라 비로소 마음이 과학의 연구 대상이 되었다. 1950년대에 미국을 중심으로 마음을 연구하는 융합 학문인 인지과학(cognitive science)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인지과학은 사람의 인지 활동이 마음의 표상(mental representation)인 기호(symbol)에 의하여 설명될 수 있다고 전제하기 때문에 사고, 지각, 기억과 같은 다양한 인지 과정에서 기호가 조작된다고 본다. 마음이 기호를 조작하는 과정, 곧 특정 정보를 처리하는 과정은 계산(computation)이라 한다. 요컨대 인지과학은 마음을 기호 체계로 보고 마음이 컴퓨터처럼 표상(기호)과 계산(기호 조작)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인지과학의 초창기부터 정보처리 측면에서 몸의 역할은 별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인지과학자들에 따르면, 몸은 감각기관을 통해 외부 세계의 정보를 획득하여 뇌로 전달하고, 이 정보를 처리하는 뇌의 지시에 따라 운동기관을 통해 행동으로 옮긴다. 컴퓨터로 치면 몸은 입출력 장치에 불과하며 뇌만이 정보를 처리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부터 몸을 뇌의 주변장치로 간주하는 견해에 도전하는 이론이 발표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몸의 감각이나 행동이 뇌의 정보처리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몸을 단순히 정보처리 입출력 장치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른바 ‘신체화된 인지 이론’이 등장한 것이다.

맥베스 부인이 남편과 공모해 국왕을 살해하기 전에 잠든 국왕을 지켜보고 있다(조지 캐터몰, 1850). [사진=위키피디아]

“몸은 단순히 뇌의 입출력 장치 아니다”

마음이 신체화되어 있다는 주장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한, 이른바 제2 세대 인지과학의 대표적 이론가로는 미국의 언어철학자인 마크 존슨과 언어학자인 조지 레이코프를 꼽는다. 1987년 존슨은 현대철학에서 마음의 신체화를 처음으로 다룬 저서로 평가되는 『마음속의 몸(The Body in the Mind)』을 펴냈다.

이 책의 핵심 주제는 서양의 주류 철학에서 철저히 무시되었던 몸의 중심성을 회복하는 것, 곧 ‘몸을 마음 안으로 되돌려 놓는 것’이다. 존슨은 이 책에서 “몸은 마음 속에 있고, 마음은 몸 속에 있으며, 몸-마음은 세계의 일부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레이코프와의 공동 작업을 통해 체험주의(experientialism)라는 새로운 철학적 접근을 시도했다.

1999년 레이코프와 존슨은 『몸의 철학(Philosophy in the Flesh)』을 펴냈다. 책의 부제인 ‘신체화된 마음의 서구 사상에 대한 도전’처럼, 두 사람은 2002년 출간된 한국어판 서문에서도 “우리는 새로운 신체화된 철학, 즉 몸 안에서의 몸의 철학을 건설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연구의 배경을 설명했다. 레이코프는 1970년대 말부터 노엄 촘스키의 형식언어학을 비판하면서 인지언어학(cognitive linguistics)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창시했다.

『몸의 철학』은 레이코프와 존슨이 제안하는 신체화된 마음 이론을 집대성한 성과로 평가된다. 두 사람은 이 책에서 ‘인지과학의 세 가지 주요한 발견’에 입각해서 신체화된 마음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첫째, 마음은 본유적으로 신체화되어 있다. 인간의 마음은 신체적 경험, 특히 감각운동 경험에 의해 형성된다. 따라서 “마음이 컴퓨터 소프트웨어와 같아서 어떤 신경 하드웨어에도 작용할 수 있는 컴퓨터 같은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둘째, 인간의 인지는 대부분 무의식적이다. 의식적 사고는 거대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모든 사고의 95%는 무의식적 사고이다.

셋째, 우리의 사고는 대부분 은유적이다. 우리는 가령 ‘사랑은 여행’이나 ‘죽음은 무덤’과 같은 개념적 은유(conceptual metaphor)를 수천 개 사용하여 생각하고 말한다. 이러한 은유는 신체화된 경험에서 나온다. 그래서 은유가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레이코프와 존슨은 “마음의 신체화, 인지적 무의식(cognitive unconscious), 은유적 사고는 한데 묶여서 이성과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을 요구한다”고 전제하면서 특유의 신체화된 마음 이론을 정립했다.

레이코프는 인지언어학을 정치학에 접목시킨 진보적인 사상가로도 유명하다. 대표작인 『도덕, 정치를 말하다(Moral Politics)』(1996, 2002)와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Don’t Think of An Elephant)』(2004)는 국내에도 번역 출간되었다.

1987년 『마음속의 몸』 출간을 계기로 논의가 시작된 신체화된 인지 개념은 1991년 칠레의 생물학자인 프란시스코 바렐라(1946~2001)가 두 명의 저자와 함께 펴낸 『몸의 인지과학(The Embodied Mind)』에 의해 인지과학의 핵심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이 책은 동·서양의 사상가를 한 명씩 끌어들여 몸과 마음의 관계를 분석했다. 한 사람은 프랑스의 철학자인 모리스 메를로퐁티(1908~1961)이고, 다른 한 사람은 인도의 승려인 용수(150?~250?)이다.

메를로퐁티는 실존주의적 현상학을 전개하여 주관과 객관, 자연과 정신 등의 이원론적 분열을 배격했다. 그에게 인간은 신체를 통해 세계 속에 뿌리를 내리는 존재인 ‘신체적 실존’이다. 1945년 펴낸 『지각의 현상학』 서문에서 “세계는 나의 모든 사고와 나의 모든 분명한 지각의 자연스러운 배경이며 환경이다”라고 설파했다.

이러한 신체적 실존에 있어서 마음은 ‘신체를 통하여 구현된’ 것이며 지각이야말로 인간과 세계의 원초적이며 근본적인 관계인 것이다. 신체적 실존의 지각 현상을 강조한 메를로퐁티는 마음에 관한 연구인 인지과학에서 인간의 경험이 논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셈이다.

서기 2세기 후반에 대승불교 사상의 철학적 근거를 마련한 용수는 중관론(中觀論)의 창시자이다. 중관론 또는 중론은 주관과 객관, 대상과 속성, 원인과 결과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이분법을 배격한다. 용수는 독립적인 존재성을 지닌 어떠한 것도 결코 발견될 수 없으므로 “상호의존적으로 발생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완전한 상호 의존성에 관한 용수의 논증은 연기(緣起, dependent arising)의 이론에 관한 그의 저작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연기는 ‘여러 방식으로 발생하는 조건들에 의존함’ 또는 ‘상호의존적 발생’을 의미한다. 연기의 개념을 기본으로 하는 용수의 중론은 주관주의와 객관주의의 극단을 배격하는 중도(middle way)의 입장이라는 측면에서 메를로퐁티의 사상과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뜻한 커피 마실 때 계약률 높아져

『몸의 인지과학』에서 메를로퐁티와 용수가 언급된 이유는 자명하다. 인지가 몸과 환경의 상호작용을 통해 발생한다는 것, 다시 말해 “인지는 감각운동 능력을 지닌 신체를 통해 나타나는 경험에 의존하는 것”임을 설명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일 터이다.

신체화된 인지 이론은 이를 뒷받침할 만한 과학적 증거가 없어 한때 조롱거리가 되기도 했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 여러 사례가 발표되었다. 대표적인 연구 성과는 맥베스 효과(Macbeth effect)의 발견이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서 맥베스 부인은 남편과 공모하여 국왕을 살해한 뒤 손을 씻으며 “사라져라. 저주받은 핏자국이여”라고 중얼거린다.

그녀의 손에는 피가 묻어 있지 않았지만 손을 씻으면 죄의식도 씻겨 내려간다고 여겼는지 모른다. 캐나다의 종첸보와 미국의 캐티 릴렌퀴스트는 실험에 참가한 학생들에게 윤리적 행위나 비윤리적 행위를 했던 과거를 회상하도록 했다. 그리고 W□□H와 S□□P를 완성하게 했다. 실험 결과 비윤리적 행위를 떠올린 학생들은 W□□H를 가령 WISH가 아니라 WASH, S□□P를 STEP이 아니라 SOAP처럼 몸을 씻는 행위와 관련된 단어로 완성할 가능성이 윤리적 행위를 회상한 학생들보다 더 높게 나타났다.

비윤리적 행위를 떠올린 학생들은 자신의 마음이 더럽혀졌다고 느꼈기 때문에 비누로 손을 씻으면 마음도 깨끗해진다고 여긴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실험 결과는 ‘맥베스 효과’라고 명명되었으며, 2006년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9월 8일자에 발표되었다. 맥베스 효과는 마음이 윤리와 같은 추상적 개념을 이해할 때 몸의 도움을 받는 증거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에, 몸이 마음의 인지 기능에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신체화된 인지 이론에 동의한다면 실생활에 활용할 만도 하다. 2011년 격월간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마인드’ 1, 2월호에 따르면 가령 상거래를 할 때 상대에게 차가운 음료보다 뜨거운 커피를 마시게 하면 따뜻한 느낌을 갖게 되어 계약을 성사시킬 확률이 높아진다.

따뜻함과 같은 신체의 감각이 마음의 인지와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증거인 셈이다. 이처럼 몸의 순간적인 느낌이나 사소한 움직임이 사회적 판단이나 문제해결 능력에 영향을 미치는 사례는 일상생활에서 손쉽게 찾아낼 수 있다. 그러니까 사람의 몸을, 뇌에 정보를 입출력하는 주변장치로만 볼 수 없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지니게 된다.

이인식 지식융합연구소장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국가과학기술자문위원, KAIST 겸직교수를 지냈다. 신문에 490편, 잡지에 160편 이상의 칼럼을 연재했다. 『지식의 대융합』 『이인식의 멋진 과학』 『자연은 위대한 스승이다』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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