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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택동의 "상병" 왕명|중공 9전 대회에 뛰어든 날벼락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문화 혁명은 한마디로 「아군」과 「적군」을 가려내는 중공의 한토막 소란극이다 할 수 있는데, 제9차 전당 대회를 계기로 뜻하지 않은 복병이 모택동의 전면에 나타났다.

<현재도 중앙위원>
사실 중공은 3년여의 문혁을 통해 유소기·등소평 등의 「적군」을 몰아내고 「아군」만의 인맥을 정리하는데 성공, 구전대회에서 「모-임 체제」의 확립을 공식 확인하는 잔치를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약간 당황한 것은 물론이다.
의외의 복병이란 다름 아닌 중공당의 전 총서기였으며 현재에도 명목상으로는 중앙위원의 명단에 있는 왕명 (실명은 진소우·62)을 비롯 장문천 전 주소대사, 습중훈 전 부수상, 「우란프」 전 내몽고자치구 주석 등의 일파이다.

<「모스크바」 망명>
이들은 모스크바에 망명해 있으면서 자기네들이 중국 공산당의 정통파라고 주장하며 반모 운동을 적극 전개하고 있다.
왕명은 중공당의 제3대 지도자로서 한때는 『왕명 노선』이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당의 실권을 한손에 쥐고 흔들었던 인물이다. 그는 l956년 신병 요양차 「모스크바」에 갔다고도 하고 악화한 소련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60년께 모택동의 부탁을 받고 「모스크바」를 방문했다는 설이 있으나 확인된 것은 아니다.
56년의 제8차 전당 대회에서 모택동이 왕명을 가리켜 기회주의자라고 비난한 것을 보면 아마도 둘 사이에는 이때부터 당 이론을 달리한 것 같다.

<미·소서 양면 작전>
중·소간의 군사 충돌의 원인을 1956년 내지 58년에 구하는 일반의 통설로 미루어보아 대소 정책에서도 이견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모택동이 국·공간의 전투에서 거의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48년 전까지만 해도 모는 「스탈린」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있지 않았다.
「스탈린」은 당시만 해도 소련의 동방에 강대한 국가가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도록 하고 20세기 초에 상실한 만주에 있어서의 제정 「러시아] 의 지위와 치외법권을 회복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는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정책에 동조, 표면에서는 장개석을 지지하면서 뒤에서는 중국 통일 사업이 성공할 수 없게 양면 작전을 썼던 것이다. 그것은 국민 정부가 광동으로 옮았을 때에도 소련 대사가 그곳까지 따라간 사실로도 증명되고 있다.

<캐나다지에 기고>
중·소간의 역사적 사실은 어떻든간에 왕명이 최근 「캐나다」 공산당 기관지 「캐나디언·트리뷴」에 기고한 한 논문은 소련의 비위를 맞추는데 충분했다.
『모택동 일파의 반혁명적 범죄 (문화 혁명)의 결과 중국 혁명의 성과는 전멸의 위기에 놓여 있다.』 「크렘린」 당국은 때를 놓칠세라, 지난 3월28일자 당 기관지 「프라우다」와 국방성 기관지 「크라스나야·즈베즈다」에 전재하고 동시에 「모스크바」 방송을 통해 보도하면서 왕명 일파를 추켜세웠다.
왕명은 문화 혁명 중에도 「마마비치」라는 필명으로 반모론을 폄으로써 모택동과 대결했다.

<분쟁 더 빈번할 듯>
「뉴요크·타임즈」지는 2일자 사설에서 소련이 모택동의 정적인 왕명을 중공당의 정통파로 인정하고 그를 중심으로 망명 중공당을 조직시킬는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만일 그럴 경우 오는 6월 「모스크바」서 열리는 세계 공산당 대회에는 이들이 중공 대표로 초청될 가능성마저 없지 않을 것이다. 어떻든 중·소의 적대 관계는 보다 악화하고 중·소 국경 분쟁은 더욱 빈번해질 것이라는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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