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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입니다, 잠시 창밖을 보시죠" 퇴근길 웃음꽃 피우는 지하철 방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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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개성 있는 안내방송으로 화제가 되고 있는 지하철 차장들이 지난 18일 서울메트로차량사업소에 모였다. 왼쪽부터 손승근·김득일·이강섭·안대천·임동열·정재운 차장. 김상선 기자

잡지사 인턴으로 일하는 정다희(25)씨는 지난 13일 오후 7시쯤 지하철 3호선 약수역에서 수서행 열차를 탔다. 고단한 퇴근길, 정씨는 평소처럼 스마트폰에 고개를 묻었다. 10분 뒤 열차가 한강을 지날 무렵 열차 안 스피커에서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한강을 지날 때만큼은 스마트폰을 잠시 내려 두고 창밖을 보는 게 어떨까요. 오래된 친구를 볼 수도 있고 이상형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삶은 우연에서 시작하는 것 아닐까요.”

 최근 2주간의 야근으로 피곤했던 정씨는 짧지만 육성으로 흘러나오는 방송을 듣고 큰 위로를 받았다. 정씨는 “방송이 나오자 열차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드는 영화 같은 장면이 펼쳐졌다”며 “서로를 보며 웃는 등 분위기가 밝아졌다”고 말했다.

 정씨는 귀가 후 이 일을 트위터에 올렸다. 글은 1300회 이상 리트윗(퍼나르기)되는 등 네티즌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 다음 날 한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에 소개되기도 했다. 이날 정씨가 들은 건 3호선 수서 승무사업소 소속 손승근(27) 차장의 방송이었다. 손 차장은 “퇴근하다 보면 오랜 친구가 그리워질 때가 있다”며 “당시 퇴근 시간이라 승객들도 비슷한 마음일 것 같아 즉석에서 떠올린 생각을 방송했다”고 말했다.

 지난 2월 입사한 손 차장은 한 달 뒤 사내 소모임 ‘행복방송지기’에 참여하면서 방송을 시작했다. 그는 “합성기계음인 지하철 방송이 아닌 인간다운 목소리를 승객에게 들려주고 싶었다”며 “특히 한강을 지날 땐 감수성이 풍부해지는 시간이라 생각해 꼭 방송을 한다”고 말했다.

 3호선의 코드가 ‘감성’이라면 2호선은 ‘코믹’이다. 2호선 김석준(33) 차장은 지난해부터 웃음을 주는 방송을 하고 있다. 김 차장은 강남스타일이 한창 유행일 때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강남역에 정차하고 있습니다”라는 안내방송으로 포털사이트 인기검색어에 오르내렸다.

 1호선은 ‘문학적’ 방송, 4호선은 ‘진심 어린’ 방송을 추구한다. 1호선 이경훈(34) 차장은 “한 달에 책을 10권 정도 읽으며 승객과 공유하고 싶은 문구를 이야기한다”고 말했다. 4호선 나인수(44) 차장은 “올 초에 ‘임산부나 어르신에게 자리를 양보하면 오늘 하루가 더 따뜻해지지 않을까 합니다’라고 방송했는데 한 임신부가 일부러 맨 뒤칸까지 와서 음료수를 건넸다”고 했다.

 행복방송지기는 2011년 1~4호선을 운영하는 서울메트로가 기관사·차장을 대상으로 방송교육을 위해 만든 모임이다. 매달 한 번 서울 네 곳의 차량기지에서 신청자를 대상으로 모임이 열린다. 아나운서 교육을 받고 방송 멘트와 방식을 서로 연구한다. 서울메트로가 방송이 가능한 건 기관사 한 명만 타는 지하철 5~8호선과 달리 기관사와 차장 2명이 열차를 운행하기 때문이다.

 지하철 방송이 시작되면서 승객의 칭찬도 늘고 있다. 수서 승무사업소의 경우 상반기 고객 칭찬 민원은 지난해 8건에서 올해 27건으로 3배 이상 많아졌다. 수서 승무사업소 이도현(52) 승무부장은 “앞으로도 직원들이 개성 있고 톡톡 튀는 멘트들로 승객들을 즐겁게 할 수 있도록 안내방송을 장려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정봉 기자, 장혁진 예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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