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권 살 사람이 없다 … 회사채 시장 '패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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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장의 양적완화 축소 방침이 한국회사채 시장을 강타했다. 20일 여의도 증권사 채권 담당자들에겐 기업
재무 파트 직원들의 전화가 빗발쳤다. “조금이라도 빨리 회사채를 발행할 수 없겠느냐”는 내용이었다. 기업들은 최근 시장 금리가 오름세를 타자 채권 발행을 되도록 늦추려는 분위기였다. 금리가 떨어질 때를 기다려 이자 부담을 낮추자는 거였다. 그러나 ‘버냉키 쇼크’는 기업들의 이런 기대에 찬물을 끼얹었다.

AA- 하룻새 금리 0.14%P 급등
 
이날 시장 금리는 일제히 뛰어올랐다. 신용등급 AA- 기업의 3년만기 무보증 회사채 금리가 연 3.32%로 0.14%포인트 급등했다. BBB-도 연8.95%까지 올랐다(0.14%포인트 상승). 기업들에 더 무서운 건 거래 실종이다. 한 채권시장 관계자는 “장 초반은 완전히 패닉이었다. 금리 오름세도 가팔랐지만 채권을 사겠다는 사람이 뚝 끊겼다”고 전했다. 미국의 양적완화 축소는 금융시장만의 문제가 아니다. 상당수 한국 기업이 직접적인 영향권에 들어있다. 뇌관은 마비 증세를 보이고 있는 회사채 시장이다. 회사채 시장 경색은 자금이 달리는 기업들에겐 치명적이다. 기업들은 통상 회사채 발행으로 자금을 조달한다. 회사채 발행이 여의치 않으면 자금압박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이는 신용등급 강등으로 이어지고,신용등급이 떨어지면 회사채 발행이 더 어려워지는 악순환에 빠진다.

 회사채 시장이 마비 조짐을 보인 지는 오래됐다. 그러다 이달 초 STX팬오션의 법정관리와 미국 양적완화 축소 우려라는 대형 악재로 마비가 한층 심해졌다. 우선 발행시장이 눈에 띄게 위축됐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6월 셋째주(17~21일) 기업들의 회사채 발행 규모는 4810억원으로, 4월 둘째주(8~12일 2조1700억원)의 5분의 1로 줄어들었다.시장에 회사채를 내놓아도 팔리지 않기 때문이다.

 여파는 우량기업에까지 미치고 있다. 신용등급 AA-인 CJ헬로비전은 18일 회사채 1500억원을 발행했다. 그러나 시장 수요가 200억원에 불과해 주간 증권사가 나머지 1300억원을 떠안았다. CJ그룹은 이후 대한통운·CJ오쇼핑 등 계열사의 회사채 발행을 연기했다. 다른 대기업들도 회사채 발행 계획 재점검에 들어갔다.

해운·조선·건설 특히 심각

 문제는 당장 돈이 급한 비우량(신용등급 A+ 이하) 기업들이다. 비상이 걸린 일부 기업은 고육지책으로 ‘단기·고금리’ 카드를 쓰고 있다. 동양은 최근 1년6개월 만기 회사채 610억원을 연 7.94%에 발행했다. 동부건설도 1년 만기 회사채 600억원을 연 8.9%에 팔았다.

 업종별로는 해운·조선·건설이 특히 심각하다. 해운업체의 3년 만기회사채 평균 금리는 지난달 연 5%대 후반에서 최근 연 9%대로 치솟았다. 26일 5년 만기 500억원 규모의 회사채를 발행할 예정인 SK해운(신용등급 A0)은 희망 금리를 연 5~5.1%로 정했다. 5년 만기 A0등급 회사채의 금리 평균이 4%대임을 감안하면 금리를 상당히 더 얹어주는 것이다. 한화증권 김은기 애널리스트는 “지금처럼 해운·조선업이 어려
운 상황에서는 발행해봐야 수요가 거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 대형 건설회사는 회사채 대신 기업어음(CP)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회사채보다 만기가 짧고 금리는 더 높아 기업 부담이 훨씬 커지는데도 그렇다. GS건설은 연초 8400억원의 CP를 발행했고 삼성물산과 롯데건설도 각각 2000억원,3000억원의 CP를 찍었다.

건설사들, 부담 더 큰 어음 발행

익명을 요청한 한 대형건설회사 임원은 “CP를 대규모로 발행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사정이 좋지 않아 회사채 발행이 어렵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한국주택협회 김동수 진흥실장은 “회사채 시장이 지금보다 더 경색되면 비교적 건실한 30위권 건설사 중에서도 문을 닫는 곳이 나올 수 있다”고 우려했다. 시장에선 정부의 적극적인 대책을 주문하는 목소리가 높다. 신동준 동부증권 투자전략본부장은 “건설·해운·조선 업종이 어렵다지만 상위 기업들은 세계적 경쟁력이 있다. 정부가 한시라도 빨리 구조조정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야 기업들이 고사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상렬·홍상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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