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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냉키 돈 계속 찍는데 … '그린스펀 트라우마'에 떠는 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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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미국 국채 버블이 붕괴하는 듯했다. 지난 한 주 미국 10년 만기 국채 값이 2% 넘게 추락했다. 가격 변동이 적어 안전 자산의 대명사다. 게다가 지난달 초까지만 해도 품귀현상에 시달릴 정도였다. 사려는 투자자가 많아서였다. 이런 미국 국채 값이 최근 20여 일 동안 뚝뚝 떨어졌다. 로이터·블룸버그 통신 등은 지난 한 주 내내 “국채 시장에 피가 흐르고 있다”고 전했다. 미국 국채는 글로벌 자산시장의 푯대다. 기준이 흔들리자 온갖 자산 가격이 요동했다. 다른 선진국과 신흥국 국채를 비롯해 주가가 급하게 떨어졌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시장 참여자들이 신흥국 자산을 덤핑(팔아치우기)하고 있다”고 지난주 보도하기도 했다. 그 바람에 중국마저 외국 자본이 빠져나갈까 걱정할 정도다.

 도대체 까닭이 뭘까.

 일본 아베노믹스 실패 우려가 증폭된 탓이 크지만 미국의 양적완화(QE) 축소 또는 중단 가능성이 가장 큰 요인으로 꼽힌다. 계기는 벤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 의장의 지난달 22일 의회 발언이었다.

 당시 버냉키는 “갑작스러운 QE 축소나 중단이 실물 경제에 충격을 줄 수 있다”며 “일자리 창출 등 경제상황이 꾸준히 개선되는 모습을 보이면 자산 매입(QE) 규모를 줄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중앙은행가의 전형적인 애매모호한 발언이었다.

그러나 미 투자전문지인 알파매거진은 15일(현지시간) “글로벌 시장은 1994년 비슷한 충격을 한 차례 경험했다”며 “그 트라우마 때문에 버냉키의 말을 계기로 서둘러 채권과 주식을 팔아치우고 현금 확보에 나서고 있다”고 전했다.

그린스펀, 1994년 기준금리 기습 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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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충격은 바로 ‘그린스펀 쇼크(Greenspan Shock)’다. 그해 2월 4일 앨런 그린스펀 Fed 의장이 기습적으로 기준금리를 올렸다. 통화 완화에만 길들여진 당시 글로벌 시장은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최근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올 5월 22일 버냉키 발언 이후 월가 사람들이 ‘QE 이후 세계’를 가늠해보기 위해 눈을 과거로 돌렸다”며 “그들의 눈이 미친 곳이 바로 94년 그린스펀 쇼크”라고 보도했다.

 당시 충격이 크긴 컸다. 그해 그린스펀은 2월 기준금리를 3%에서 3.25%로 0.25%포인트 인상했다. 프랭크 파트노이 미국 샌디에이고대 교수는 그때 월가 상황을 정리한 『전염성 탐욕』에서 “마치 기습 공격에 대패한 군단이 도망가는 모습이었다”고 했다.

 그럴 만했다. 그린스펀은 91년 침체를 해결하기 위해 공격적으로 금리를 내리고 돈을 풀었다. 기준금리를 연 3%에서 17개월 동안 유지했다. 이전까지 저금리 기간은 길어야 6개월이었다. 그 시절 Fed는 4개월 정도 통화 완화 정책을 유지하다 금리를 올렸다.

저금리 환상 깨지며 멕시코 금융위기

 로버트 헤첼 미 리치몬드연방준비은행 이코노미스트는 저서 『Fed의 통화정책』에서 “그린스펀의 오랜 통화완화 때문에 시장은 저금리가 영원히 이어질 것이란 환상에 젖어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린스펀은 94년에 금리를 여섯 차례 인상했다. 3%이던 기준금리가 그해 말엔 5.5%가 됐다. 시장에 풀려 있던 달러가 아주 빠르게 Fed 로 빨려들어갔다. 미국 국채 값이 뚝뚝 떨어졌다. 시장 금리가 치솟았다. 주가가 급락했다.

 파장은 자산 시장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미 국내 금리가 치솟는 바람에 저금리 시대에 맞춰 파생상품으로 머니 게임을 벌였던 캘리포니아주 오렌지카운티가 그해 12월 파산을 선언했다. 그리고 미국의 이웃인 멕시코가 금융위기를 맞았다(테킬라 효과).

 베리 아이켄그린 미국 UC버클리대 교수는 “미국이 자국 상황만 고려해 장기간 통화 완화를 유지했고 또 기습적으로 금리를 올렸다”며 “그 바람에 멕시코가 당했다”고 말하곤 했다. 버냉키가 QE를 축소하거나 중단하면 신흥국이 당할 수 있음을 짐작하게 하는 말이다.

 더욱이 요즘 QE와 저금리 정책으로 풀려나간 달러가 어림잡아 2조3000억 달러(약 2600조원) 정도다. 그린스펀이 90년대 초 푼 달러는 고작 1200억 달러 정도였다. 그때와 지금의 경제 규모나 인플레이션 등을 감안하더라도 버냉키가 그린스펀보다 몇 곱절 많은 달러를 찍어낸 것은 분명하다. 투자의 귀재인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마저 지난달 주주총회에서 “(너무나 많은 돈을 찍어내) QE 이후 세계가 어떨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미 글로벌시장에선 제2의 데킬라 효과에 시달릴 후보국 이름들이 나돌고 있다. 알파매거진은 최근 전문가들의 말을 빌려 “인도와 베트남·브라질·아르헨티나 등”이라며 “ 이들 나라 가운데 한 곳은 94년 멕시코처럼 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는 게 시장의 관측”이라고 보도했다.

19년 전 쇼크 학습효과 … 투자자 과민반응

 그러나 문제는 ‘버냉키가 그린스펀처럼 충격적인 요법을 쓸까’이다. 14일 로이터통신은 “전문가들은 대체적으로 글로벌 시장이 지레 겁먹고 있다는 쪽”이라고 전했다. 가장 큰 이유는 요즘 미국의 경제 상황이 94년과 다르다는 점이다. 당시 미 경제는 회복 국면을 지나서 확장 단계에 들어서 있었다. 그린스펀이 금리를 올린 94년 2월 당시 실업률은 6%대였다. Fed는 실업률이 6%대로 낮아지면 침체가 끝났다고 본다. 지난해 버냉키도 “실업률이 6.5%로 하락하면 QE 정책을 바꿀 수 있다”고 발표했다. 현재 미국 실업률은 7%를 웃돌고 있다.

 미국은 재정수단으로 경기를 부양하기도 어렵다. 일괄 재정지출 감축(시퀘스터)이 실시되고 있다. 이런 때 버냉키가 통화긴축 고삐를 잡아당기면 미 경제는 심각한 충격에 빠지기 십상이다. 또 버냉키는 내년 1월 말에 Fed 의장에서 물러난다. 임기가 7월 남짓 남아 있는 셈이다. 이런 그가 글로벌 시장에 충격을 주는 결단을 내리기 쉽지 않다. 더욱이 요즘 미국 국채 값이 하락하는 바람에 시장 금리가 가파르게 오르고 있다. 기업 투자가 위축되기 십상인 상황이다. 버냉키가 QE를 축소하거나 중단하기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다.

IMF “미 양적완화 축소 올해 안엔 어려워”

 국제통화기금(IMF)도 QE 축소나 중단이 올해 안에 어렵다는 쪽이다. IMF는 15일 발표한 미국 경제 전망에서 “미국이 올해 말까지는 QE 규모를 유지할 것”이라며 “내년에 축소가 이뤄져도 그 규모는 크지 않을 전망”이라고 밝혔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IMF 총재는 “Fed가 자산매입(QE) 규모 축소를 이제 막 논의하기 시작했다”며 “글로벌 시장 투자자들이 과도하게 반응하고 있다”고 말했다.

강남규 기자

테킬라 효과(Tequila Effect)  1994년 12월 본격화한 멕시코 페소화 위기가 이듬해인 95년 아르헨티나 등으로 확산된 현상. 당시 글로벌 시장 참여자들이 “멕시코산 테킬라에 남미가 취해 흔들거린다”며 그렇게 불렀다. 처음엔 아르헨티나 등이 멕시코와 지리적으로 멀지 않아 위기가 전염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나중에 연구 결과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경제 상황과 해외 자금 유입 구조가 비슷한 나라로 위기가 퍼진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97년 태국이 위기를 맞은 뒤 사태가 인도네시아와 한국 등으로 전염될 때도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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