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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입에 모란꽃이 활짝 피었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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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7호 09면

1 화조도 8폭 병풍 중 6번째, 19세기 후반∼20세기 전반, 103.3X34.3㎝.

청계천변 광교 일대는 지금은 번잡스러운 비즈니스 지역 중 하나지만, 조선시대에는 매우 운치가 있는 곳이었다. 광통교라고 불렸던 청계천변 일대에서는 그림도 팔고 예인들의 거리 공연도 행해졌다. 그 시절 “한낮 광통교 기둥에 울긋불긋 걸렸던” 그림은 당시 속화(俗畵)라고 불리던 민화(民畵)였다. 18세기 후반 한양의 이곳저곳을 묘사한 시 ‘한경사(漢京詞)’를 쓴 강이천은 이 그림들에 대해 “솜씨들도 나쁘지 않아 도화서의 솜씨에 버금간다”고 표현했다.

호림박물관 ‘民畵, 상상의 나라_민화여행’전

그림 시장은 꽤 오래 존속해서 20세기 초 주한 이탈리아 총영사로 부임한 카를로 로제티(Carlo Rossetti)는 광통교 일대의 지전에서 다양한 종류의 용과 호랑이 그림을 값싸게 살 수 있다고 기록했다. 또 집집마다 그림이 걸려 있었다고 증언하는데, 추측건대 모두 우리가 지금 민화라고 부르는 그림들일 것이다.

2 화조도 8폭 병풍 중 4번째, 19세기 후반∼20세기 전반, 94.6X44.3㎝.

이 민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됐다. 서울 신사동 성보문화재단 호림박물관의 ‘民畵, 상상의 나라_민화여행’(5월 10일~9월 14일)전은 성보문화재단에서 그간 수집해온 소장품 민화를 펼쳐놨다. 세 개 층의 공간을 활용한 차분하고 진중한 디스플레이 방식은 이미지 하나하나를 찬찬히 감상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80여 점이라는 적지 않은 작품들이지만, 하나하나 곱씹으며 보는 재미에 지루한 줄 모른다.

민화의 전성시대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이었다. 18세기 영·정조 시대의 문화적 풍요로움 속에서 문화 향수의 계층이 확대된 덕분이다. 민화는 새해 벽두에 대문에 그림을 붙여 귀신을 쫓는 세화(歲畵)에서 유래했다. 왕실에서 주로 그려지던 그림이 민간으로 확대된 것이다. 민화의 기원이 궁중의 세화였다는 것은 이 그림의 수요층이 서민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궁 밖의 모든 사람들, 사대부층과 여염집, 심지어는 사찰과 무당집에까지 걸려 있던 그림이 민화다.

당시 사람들은 그림과 함께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병풍의 형식이 유난히 눈에 많이 띄는 것은 민화가 바로 생활 속 실용적인 용도를 가진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제사, 장례, 혼례, 생일잔칫날 등 중요한 날에 병풍과 그림은 빠지지 않았다.

이런 특별한 날뿐만 아니라 ‘효자도’와 ‘문자도’는 매일매일의 마음을 다잡는 훈육을 위한 그림이었다. 민화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마음이 둥글어지고 어여뻐지는 것을 느끼게 되는데, 그 이유는 그림에 대한 사랑 이전에 삶에 대한 사랑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민화는 삶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그림이었다.

3 화병도 8폭 병풍.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6번째, 8번째, 2번째, 4번째. 각 73.0X26.9㎝. 4 화조도 8폭 병풍, 19세기 후반∼20세기 전반, 각 103.3X34.3㎝.
5 책거리 8폭 병풍 중 2번째, 19세기 후반∼20세기 전반, 105.1X32.5㎝.

액 막고 복 부르는 상징물들 담은 ‘부적’
여기는 물고기가 펄떡 뛰어오르고, 꽃들은 만발하고, 씨가 많은 갖가지 과일들이 풍성하며, 모든 것이 쌍쌍이 짝을 이루는 환상적이고 행복한 세상이다. 이 그림들은 그림 수요층의 솔직한 염원과 자유롭게 경계를 넘나드는 분방함이라는 한국적 DNA를 그대로 담고 있다.

사실 서양 미술에는 3차원의 입체적인 세계를 재현하겠다는 목표가, 문인화에는 현실을 초극하는 정신성이 담겨야 했다. 이와 달리 민화의 세계는 어떤 규약과 요구에서도 자유로운, 분방한 상상력이 펼쳐진다. 나쁜 액을 막고 좋은 기운을 부르는 벽사( 邪)와 길상(吉祥)은 논리의 영역도 아니고 현실의 영역도 아닌, 오로지 바람(wish)의 영역이다. 속속들이 들어있는 바람의 상징과 꿈이 풍요롭고 찬란하다. 민화 속에 표현되고 있는 ‘행복ㆍ무병장수ㆍ자손번창ㆍ출세’ 등은 21세기의 우리도 여전히 바라고 있는 것들이 아닌가.

민화 속에 담긴 소박하고 진솔한 바람들은 기상천외한 도상의 혼합을 가져왔다. 자유분방한 민화의 세상. 이곳은 해서는 안 되는 것도 없고, 할 수 없는 것도 없는 세상이다.

민화에서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 것은 단연코 화조도(花鳥圖)다. 꽃과 새가 어우러진 그림은 장식성도 높아 집 안을 화사하게 꾸밀 수 있고, 소재 하나하나에 기복적인 의미를 담을 수 있어 많은 사랑을 받았다. ‘화조도 8폭 병풍’은 부부 금실을 상징하는 쌍쌍이 짝지은 새들과 부귀를 상징하는 만개한 목단 같은 대표적인 길상 이미지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여느 화조도와 달리 이 그림 속에는 호랑이ㆍ용ㆍ해태 같은 벽사를 의미하는 동물들도 함께 등장한다. 꽃들은 모두 각 동물의 입에서 자라나오는 것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화가의 상상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벽사를 상징하는 동물들이 상서로운 기운(瑞氣)을 내뿜듯이 복을 피워내고 있다. 액을 막고 복을 부르는 일은 결국은 하나라는 듯.

가장 한국적인 욕망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 책거리 그림일 것이다. 정사에 바빠 공부를 하지 못할 때는 책그림으로라도 위안을 받겠다던 정조의 뜻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책거리 그림은 선비의 방을 장식하던 중요한 그림이었다. 책거리 도상의 보급이 확대될수록 부귀를 상징하는 꽃과 장수를 상징하는 십장생, 자손 번성을 상징하는 여러 과일이 함께 그려진다.

‘어해도 8폭 병풍’에서도 여러 화목과 어해도를 융합시키고 있다. 그림의 배경은 수륙을 넘나들고, 민물고기와 바닷고기가 한 화면에 공존한다. 버드나무(버드나무 류는 머물 류와 동음어)를 배치하여 벼슬길에 오래 머무르기를 바라는 의미를 첨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장수를 상징하는 소나무,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모란, 연년유여 (年年有餘)의 연꽃과 쌍어 및 안락한 노후를 의미하는 백로 등이 한꺼번에 등장하고 있다. 또 남성을 상징하는 갑오징어와 여성을 상징하는 조개로 성적 상징을 유머러스하게 나타내기도 한다. 여러 어류들 이외의 배경에 길상성을 띠는 사물들을 결합한 것은 ‘다복의 중의성’, 즉 ‘온갖 복이 다 들어오기를 바라는 길상의 복합화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후대 어해도에서 급격히 늘어나는 상징은 부부화합과 다산이다. 과거제의 폐지와 더불어 일제강점기라는 당시의 암울한 시대 상황으로 말미암아 사회적인 기대보다 가정의 안녕과 평안, 즉 부부 금실과 다산의 의미를 중첩해 나타내려 한 것으로 보인다.” 박준영 학예사의 말이다.

6 수렵도 10폭 병풍 중 7번째, 19세기, 91.2X32.9㎝. 7 어해도 8폭 병풍, 20세기 전반, 각 105.4X30.3㎝.
8 자수수렵도 10폭 병풍 중 9번째, 20세기 전반, 96.6X31.8㎝.

국운이 기울어가던 시기, 민초들의 희망가
이번 전시는 공교롭게도 하나의 맥락을 갖게 되었다. 7월 21일까지 덕수궁 미술관에서는 ‘야나기 무네요시: 일본 민예관 소장품’전이 이어진다. 조선의 백자는 야나기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으며 일본의 근대적인 민예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의 미학은 한국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덕수궁의 전시는 역사적 관점의 부재로 야나기란 인물을 제대로 포용하지도 못하고 내뱉지도 못한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 전시에도 한국의 민화가 몇 점 포함되어 있기는 하다. 야나기는 조선미의 아름다움을 ‘한의 미학’‘애상미’라고 정립했다. 나는 오래전부터 이 말이 금과옥조처럼 받아들여지는 데 의심을 품고 있었다. 왜냐하면 민화가 보여주는 것처럼 내가 아는 한국 사람들은 애상에 잠겨 있는 슬픔의 사람들이 아니라 매우 진취적이고 명랑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민화가 번성했던 시기인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까지의 기간은 민족이 가장 암울했던 시기였다는 아이러니를 민화연구가 정병모 경주대 교수는 저서 『민화, 가장 대중적인 그리고 한국적인』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전쟁 때는 희극이 유행하고, 평화시에는 비극이 유행하는 것과 같은 원리다. 이는 정서적으로 균형을 유지하려는 노력이다. 이를 좀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민중이 민화를 통해 보여준 밝은 정서의 그림은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지탱하는 버팀목 역할을 한 것이다.” 그래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번성했던 민화는 삶의 노래였고, 민족의 암울한 시기를 극복하려는 민중들의 희망가였다.

미술사라는 것은 미술사관의 정립 없이는 쓰여지지 않는다. 결국 주어진 것들을 어떻게 볼 것이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주최 측은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들 대부분은 여타 다른 전시나 도록에서 공개되지 않았던 작품들”이며, “다양한 종류의 민화를 종합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전시가 최근에 없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밝혔다. 오랫동안 미술사에서 충분히 대우를 받지 못했던 민화에 대한 연구가 더욱 활발해져야 할 것이며 더 많이 대중에게 알려져야 할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작품의 이해를 돕는 도자기ㆍ자수ㆍ나전 등 연계 유물들이 함께 비교 전시되어 풍성하고 입체적인 볼거리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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