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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 "5공 때 무덤 속 아버지 인신공격 도 넘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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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박근혜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표 시절이던 2004년 8월 9일 전두환 전 대통령 자택을 방문했다. 박 대통령은 이후 전 전 대통령을 따로 만나지 않았다. [중앙포토]

박근혜 대통령과 전두환 전 대통령의 관계는 복잡미묘하다. 두 사람은 2004년 8월 박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표 취임인사차 예방했을 때 만난 이후 아직까지 따로 만난 적이 없다. 지난해 박 대통령은 대선 후보로 선출됐을 때도 김영삼 전 대통령과 이희호·권양숙 여사는 찾아갔지만 전 전 대통령은 만나지 않았다. 두 사람의 인연은 육사 11기인 전 전 대통령이 준장 시절인 1976년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에 보임되면서 시작됐다. 전 전 대통령은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총애하는 육사 후배였다. 당시 퍼스트 레이디였던 박 대통령에겐 깍듯하게 대했다고 한다.

 전 전 대통령은 1979년 10·26 사태 직후 청와대 금고에서 발견된 9억원 가운데 6억원을 박 대통령에게 건네기도 했다. 이와 관련, 박 대통령은 대선 당시 TV토론에서 “아버지도 그렇게 흉탄에 돌아가시고 어린 동생들과 살길이 막막한 상황에서 배려하는 차원에서 준다고 했을 때 경황이 없는 상황에서 그것을 받았다”면서 6억원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전 전 대통령은 그러나 1980년 12대 대통령에 취임한 뒤 박정희 정권과 거리를 뒀다. 박 전 대통령과의 차별화를 위해 이른바 ‘5·16 혁명정신’에 관한 사항을 뺀 5공 헌법을 만들었다. 박정희 정권 시절의 통행금지령 등 여러 정책을 폐지한 것은 물론 ‘정의사회 구현’을 국정목표로 내걸고 이전 시대를 부정과 부패, 부조리의 시대로 규정했다. 하나회 세력에 부정적인 공화당과 유정회 실세들은 부패 혐의로 제거해 나갔다.

 청와대에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 휘호가 전 전 대통령의 것으로 바뀌면서 전임 대통령의 그림자가 지워졌다. 박근혜 대통령은 당시 심경을 2007년 출간한 자서전에 이렇게 적었다.

 “청와대를 나온 이후 정권 차원에서 아버지에 대한 매도가 계속됐다. 우리 삼남매는 부모님의 기일을 포함한 어떤 공식적인 행사도 엄두를 낼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결국 추도식을 공개적으로 치를 수 없어 집에서 조용히 동생들과 제사를 지낼 수밖에 없었다.”

 박 대통령에게 배신으로 인한 트라우마가 생긴 것도 이때다.

 “아버지의 가장 가까이 있던 사람들조차 싸늘하게 변해 가는 현실은 나에게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아버지가 이루셨던 일을 폄하하고 무참히 깎아내리는 것도 모자라 무덤 속에 계신 아버지에 대한 인신공격은 그 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박 대통령이 한 호텔 엘리베이터에서 박정희 대통령 밑에서 장관을 지낸 인사를 만났는데 그 전직 장관이 아는 체를 안 했다는 것도 이 무렵이다. 박 대통령은 1989년 MBC 인터뷰에서 “5공 시절에 전두환 대통령이나 그 수하 인물들에게 박해를 받은 적이 있느냐”는 물음에 이렇게 말했다.

 “그런 기억은 없다. (하지만) 저로선 5공 시절을 상당히 가슴 아프게 살아왔다. 왜냐하면 돌아가신 아버지와 아버지가 하신 일이 너무나 극심하게 매도됐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딸로서 가슴 아픈 일이지만 국가에도 정신적으로 큰 손해를 입혔다고 믿는다.”

 또 박 대통령은 당시 “제가 새마음운동을 했는데, 그 새마음운동도 타의(5공)에 의해 해체된 거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진행자가 “백담사에 가 있는 전두환씨의 모습을 어떻게 느끼느냐”고 묻자 박 대통령은 “청문회에서 나온 일들(5공비리 등)이 없었다면 저런 일도 없었을 것”이라고 답했다.

 물론 박 대통령이 두 전직 대통령의 추징금 문제를 거론한 본질적인 이유가 개인적인 은원(恩怨)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지하경제를 양성화해 재원 마련의 기반으로 삼겠다고 좌표를 정한 이상 징세 문제에 전직 대통령이라는 ‘성역’을 남겨뒀다간 정책추진의 추동력이 떨어질 수 있다는 점, 북한 핵·미사일 위협에 대한 단호한 대응으로 상승세를 타고 있는 지지율을 더 끌어올릴 필요가 있다는 점 등이 복합적으로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짧게는 내년 지방자치단체장선거, 길게는 집권 중·후반을 내다봤을 때 핵심 지지기반인 TK(대구·경북) 지역의 여러 난맥을 정리해야 할 필요성도 있었을 것이란 분석도 나오고 있다. 이명박 정부 시절의 4대 강 비리 의혹이나 원전 비리 등에 단호한 입장을 보이는 것처럼 전직 대통령의 추징금 문제도 같은 인식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박 대통령이 5공 정권에 대해 상당히 불편한 감정을 갖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김정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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