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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권석천의 시시각각

종이로 욕심 가릴 수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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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권석천
논설위원

“진화론의 관점에서 보거라. 분노는 널 유리하게 해주는 거란다. 그게 분노의 생존 기능이다.” 미국 작가 필립 로스가 쓴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의 지적이다. 실제로 인류가 분노하지 않고 상황에 순응했다면 진화는 시작되지 않았을지 모른다.

 계속해서 민얼굴을 드러내는 재계의 모습은 이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한화, 태광, 오리온, SK…. 내로라하는 그룹 회장들이 법정에 섰다. 회사 돈을 횡령한 혐의였다. 주가 조작으로 조사받은 재벌가 2·3세는 그 수를 세기도 어렵다.

 CJ그룹 수사와 조세피난처 명단 공개는 그 연장선 위에 있다. 공통된 특징은 페이퍼컴퍼니다.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페이퍼컴퍼니를 세운 재계 인사들의 이름이 발표되고 있다. CJ도 페이퍼컴퍼니를 통해 비자금을 굴린 의혹으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그렇다면 페이퍼컴퍼니는 무엇인가. 말 그대로 종이(paper), 즉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회사(company)다. 한국외대 로스쿨 최승필 교수의 설명이다.

 “특정 프로젝트를 위해 실체 없는 회사에 법인격을 주는 건데요. 그 자체로는 불법이 아닙니다. 문제는 페이퍼컴퍼니에 들어간 자금의 성격과 목적이죠. 무역에 필요할 수도 있지만 탈세를 할 수도 있고….”

 기업 돈이 오너 개인의 호주머니로 유입되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마법의 연금술처럼 보이지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조세피난처에 법인 등록을 한 뒤 주소지에 우편함 하나만 있으면 된다. 버진아일랜드의 중심 도시 토르톨라에 가면 건물마다 세계 유수 기업들이 만든 페이퍼컴퍼니 우편함들이 즐비하다. 우리도 글로벌 기업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걸 자랑스러워해야 할까.

 국세청 조사와 검찰 수사에서 불법성이 나타나면 마법은 풀린다. 페이퍼로 가리려 했던 건 탐욕 아니었을까. 종이를 접어 세금 천국을 세우려 했던 이들은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 내 이름은 명단에 없다고 안도해선 안 된다. 재계 전체가 각성해야 할 일이다. 이제 어떤 명분으로 경제민주화에 맞설 것인가.

 의문은 이어진다. CJ그룹 의혹이 곪아터질 때까지 한국 사회의 시스템은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건가. 금융감독당국은 왜 비자금·주가 조작 의혹을 포착하지 못했나. 2008년 차명재산을 파악했던 국세청이 1700억원을 납부받고 고발 조치를 하지 않은 이유는 뭔가. 검찰은 왜 2008년, 2009년 두 번의 수사기회를 그냥 넘겨야 했나.

 독일과 미국을 보라. 2008년 독일 검찰은 부유층 1000여 명에 대한 탈세 수사에 착수했다. 조세피난처 리히텐슈타인의 은행 비밀계좌에 돈을 넣어둔 이들이었다. 연방정보국(BND)이 정보 제공 대가로 은행 내부고발자에게 420만 유로(60억원)를 준 사실이 드러나자 재무부 대변인은 “효율 높은 투자”라고 했다. 같은 시기 미국 오바마 정부는 스위스 정부와 은행을 압박해 285명의 비밀계좌 정보를 받아냈다. 한 전직 검사의 말이다.

 “다른 나라들은 불투명한 자금 거래를 잡겠다고 난리인데, 우린 폼이나 잡으면서 ‘안방 권력’ 행세만 했던 겁니다. 지하경제 양성화요? 관련 기관들의 자세가 바뀌지 않으면 재미없는 농담일 뿐이지요.”

 국회도 다르지 않다. 역외 탈세가 끊임없이 불거졌지만 이렇다 할 입법 노력은 보이지 않았다. 조세 전문가인 윤배경 변호사는 “미국 등 주요 국가들은 해외 자회사를 통한 탈세를 막기 위해 자회사의 ‘오염된 소득’ 중 지분 비율만큼을 소득으로 간주하는 특별 조항을 도입했다”고 말한다.

 “회장님은 나라님이셨고, CJ는 저의 조국이었습니다.” CJ 자금 관리인이 그룹 회장에게 보냈다는 편지 내용이다. 대한민국은 시스템 없이 종이로만 존재하는 페이퍼 공화국이었던 것일까. 그런 나라에서 꼬박꼬박 세금 내며 살아가는 시민들은 분노를 축적해 가고 있다. 조용히, 그리고 냉정하게.

권석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