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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가뭄의 상처 위에 또 가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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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5월은 보릿고개의 막바지. 특히 지난해 심한 가뭄을 치른 전남 한 재주민들은 보이지 않는 시름과 함께 생활에 쫓겨 숨이 차다.

<춘궁기 구호대상자 2년전보다 10배로>
가뭄 피해가 가장 심했던 농암군 삼호면은 2천2백가구 1만4천8백명 주민 가운데 1천9백69가구 1만2천8백28명이 올해의 구호대상. 66년 춘궁때의 1백23가구1천3백명보다 10배가 불어났다.
면장 윤상길씨(44)는 『대부분이 한톨의 쌀도 거두지 못한 채 생활의 전부를 자조 근로사업장에 맡기고있다』고 했다.
소류지, 응수로, 배수로등 공사장에서 일해 받는 하루 한사람에게 3·6킬로그램의 밀가루가 단하나의 연명수단.
삼호면 「원서호」부락의 김종오씨(27)는 『공사장이라도 없었다면 굶었지 별 수 있었겠느냐』고 했다.

<작년추수이후에는 「쌀밥구경」못했소>
같은 부락의 전태련 여인(44)은『어쩔것이여. 굶게 생겼으니 늙으나 젊으나 다나간당께오.』 지난해 9월부터 비오는 날만 쉬었지 놀아본 날이 없다는 얘기다. 그나마 공사장일도 희망자가 너무 많아 한 가구에서 한 사람씩만 일할 수 있도록 제한되고 있다.
해남군 황산면 한자리 신점 부락의 한일수씨(32)는 『가족이 많을수록 굶기 알맞다』고 했다. 자조사업장에서 타는 밀가루로 수제비 밀가루죽을 만들어 끼니를 잇는다. 논서마지기를 일군다는 유창환씨(32) 는『작년 추수때부터 쌀밥 구경을 못했다』면서 주식이 되다시피 한 밀가루보다는 쌀·보리를 아쉬워했다. 진도군 내면 정자리 공사장에선 지난달28일 상오10시쯤 박영남군(16)과 김죽자여인(28)이 10톤의 흙더미에 깔려 목숨을 잃었다. 해남·무안·영암·나주 등의 한해민은 그래도 자조사업장 없인 살수가 없다.
견디지 못해 고향을 등진 젊은이도 적지 않다. 삼호면 김봉원씨(43)집은, 5남3녀 중 장남만활군(24)등 4형제가 돈 벌어오겠다며 집을 나가 부산 부두에서 노동일을 한단다. 그들의 어머니 진인자여인(42)은 『굶어죽게 되어 어른들이 내보냈다』고 한숨을 쉬었다.

<한마을서 넉달동안 퇴거증명 3백80명>
같은 부락의 추원엽군(22)은 지난 1월에, 황영수씨(34)는 작년8월에 부락을 등졌다 지난 2월 다시 왔지만 며칠 견디지 못한 채 서울로 갔다는 것. 삼호면 만도 가출이 모두2백71명. 온가족이 제주도로 이동했던 동호리 백야부락의 장씨 일곱가족은 자조사업장이 생기면서 곧 돌아 오기도 했다. 해보, 황산면에서 지난1월부터 퇴거증명을 해간 사람이 모두3백80여명. 해남군 당국도 정확한 이농, 가출자수를 『지난해 10월에 조사한 후 이동 상태는 알수 없다』고.
학교에도 한재의 여독은 파고들었다. 삼호중앙국민교의 전교생은 1천14명. 전일제 수업을받는 4학년 이상 중에서 도시락을 갖고 오는 수가 불과13∼15%. 대부분의 어린이는 학교에서 주는 옥수숫가루 대용 빵 한개로 허기를 면한다.
급식 아동 수 5백명. 진학률도 엄청나게 줄어들었다. 작년에는 졸업생60%가 진학을 희망, 그 중 반반 진학을 했는데 올해는 진학 희망자수가 졸업생의 50%로 줄어 들었다.

<결식 아동67%차지 졸업반 진학도 격멸>
전남을 통틀어 총학생 수 91만2천8백86명중 한재 학생이36%인 36만2천3백80명, 그 중67%(25만7천4백95명)가 요 구호학생이다. 이 중에서 국민학교가 22만9천2백68명으로 으뜸이다. 결식 아동의 수효만 14만8백45명, 취학 중단 예상자는 5천여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수업료 기성회비를 거두지 못한 학교 재정도 따라서 궁핍하여 작년9월부터 올해3월까지 미취가 1억9천3백79만6천여원이다.
해남한자리의 김주열씨(38)는 광주부중 2학년에 다니는 장남 영택군(14)을 『휴학시켜야겠다』고 집으로 불렀다. 임광렬씨는 황산중에 다니던 셋째 아들을 휴학시킨 것등 한동네에서 7명이 휴학을 했다.
그러나 파종때가 되고, 다시 농번기에 접어든 요즘 한해 주민들의 재기 의욕은 대단하다. 일부지방에서 입맥선매를 했지만 대부분의 농민들은 선매형식에 염증을 느낀 듯. 게다가 자조사업장에서 일한 것으로 보리를 거둘 때까지 그래도 밀가루배급을 탈 수 있고 『풍작이 예상되는 올 보리농사』에 희망을 걸고 있음이 뚜렷했다.

<코앞에 닥친 농사절소 마저 내파는 형편>
다만 눈앞에 닥친 바쁜 농사철에 일손이 어디서나 부족하다. 자조사업장에 나가고 농사도 지으려면 『아무래도 작년보다 일손이 반쯤 즐어든데다 소마저 팔아없앤 것이 큰타격』이라고 무안군 일노면 월암5구의 서기원씨(49)는 걱정이 태산이다. 지난달 23일 현재 전남의 농우는 도합 15만4천44마리. 한해전보다 1만4백여마리가 줄었다.
해남 신경부락의 한씨는 지난해 11월6연생 한우를 6만원에 팔았지만 『빛 갚고 남은 돈으로 겨우 보리2가마룰 샀을뿐』이다.
종모도 충분치 못해 삼호면의 경우는50%밖에 나눠주지 못했다고 했다.
해마다 이맘때면 봄놀이가 성행했지만 올해는 놀이라곤 찾아 볼 수 가 없다.

<제철와도 혼례없고 여기저기서 계 소동>
나주읍 협신양복점 주인 김경렬씨(44)는 『사흘에 바지 주문 한개 받을까 말까』라고. 그런가하면 나주읍 이모씨(37)는 40만원짜리 계를 하던 처가 달아나 1남3여를 거느린 홀아비신세가 됐고 견디다 못 해 지난3월 이혼소송을 내기도. 해남읍 해남 서점 주인 김삼수씨는 피해자40명을 남긴 채 곗돈5백여만원을 거두지 못해 달아나 버렸다.
그뿐인가. 남혼녀가를 시키려던 부모들의 생각도 빗나가 삼호면에서 해마다 봄철이면 평균 30쌍을 넘던 결혼이 올해는 아직 한쌍도 없다.

<부업 중요성 알지만 밑천 없어 속수무책>
그래서 부업에 눈뜨기 시작했을까 .『농가부업이 얼마나 중요한 것 인지 이제사 깨달았다』고 (황산면 김주열씨). 지난해에 한재가 큰계기가 되었음은 분명하다. 『하늘만 믿고 살 순 없습니다.』 농사가 나빠져도 『부업만 했더라면 이런 고생 안할 것인데…』라는 것이 대부분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빚에 쪼들리는 반 수 이상의 농민들은 『부업을 하려해도 밑천이 없어』막상 손을 쓸수가 없고 생각만으로 그치고 있는 실정.

<빛잃는「보릿고개」|「절량」은어느때나>
삼호면「원서호」부락1백여호, 해남군 황산면 한자구역내의 7백여호가 지난해 지붕을 볏짚이 없어 이지 못해 비가 오면 새게마련.
문경새재보다 넘기 어려운 보릿고개라지만 무안군 박종덕씨(58)는 『보릿고개란말이 점차실정에 맞지 않는 말이 되어간다』고했다. 자조근로 사업, 부업 등에 눈 뜬 농민들이 『일만하면 굶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정부의 농촌정책이 「보릿고개」란 말의 빚을 앗아가고 있는 탓일까.
지난 가뭄을 겪고 『더욱 타산적인 농민』이 되어가면서 영농 자금 아닌 사채나마 어떻게 얻어 쓰느냐가 한해 농촌의 큰 고민으로 남아있다.
나주군수 박간종씨(48)는 『구호양곡으로 주는 자조사업보다 현금을 뿌릴 수 있는 정책적 배려가 아쉽다』고 했다.

<이대로만 가도 풍작 한가닥의 희망 걸고>
볏짚을 연료로 하던 일부 한해지역 특히 해남군에선 입산금지구역내의 도벌이 성행하고 『올해마저 가뭄이 든다면 더 이상 농촌에 못 살겠다』는 걱정과 『그래도 올 보리 농사가 현재 상태라면 풍작이 될것』이라는 반반의 생각과 함께 농민들의 한창 각박했던 민심은 그래도 어느 정도 안정되어 가고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노동력 없는 한해농가에 대한 취로외의 구호대책이다.

<사진>◇자조근로사업장에서 일하는 부녀자들 - 한가구에서 한사람 밖에 취업을 할 수 없어 일을 해서 끼니를 이어갈 밀가루를 배급 받으려고 여러사람들이 취업을 다투기도 했다.<현지에서 사회부 백학준·경제부 허남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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