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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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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전주고을에 칼찬 훈도가 골목을 찾아 뒤졌다. 학교선생이 「갈치토막」이라고 불리던 흰칼을 차고다닌 시절이었다. 지금 신흥중학교터전에있던 양사제엔 엉겁결에 꼬여든 초립동이들이 「개화바람」에 못이겨 옹기종기 문안에들어섰다. 1896년 조선소학교령 (고종칙령145호)이 내려진 무렵, 서학동 완산교자리에 돌다리가 놓여있었고 남문에서 객사에 이르는 길 양쪽에는 어른들도 숨어들만한 큰도랑이있었던 즈음이었다. 지금의 도로폭보다 더넓었다는 그길엔 교군군들이 『어이, 어이』하며 지나 갔고. 완주유지 임종환씨는 이때관찰부소속의 논6백두락을 기본재산으로얻어 이듬해 (1897년)7월10일 양사제에 전주공립보통학교란 신학당을 열었다.

<초립동 37명모아>
초대교원은 송순형이라는이가, 부교원은 임씨자신이되어 달래고달래어 모은 초립동의 37명을 첫생도로 삼았다. 교과목조차 글방에서 배운것과는 달리 새맛이당기도록 독서 작문 습자 산술 지지 역사등으로 짜여졌으나 『상투를 자른다』는 바람때문에 걸핏하면 생도들이 달아나곤했다. 이때문에 학교에선 「깨엿목판」까지 교실에 차려놓고 생도들을 끌어들였다고 전주국민학교의 현교장 유훈석씨(60)가 『어른들한테 들었던얘기』라면서 전했다. 이것이고도 전주의 어버이가배우고 자란 전주국민학교의 요람. 전주시대평동64번지, 지금전주국민학교의교문엔 『어버이 배우시고 우리도 자랄학교』라고 쓰여진 금자판이 지난날의 역사를 자랑해주고있다.
그러나 변화도 잦았다. 이완용이 관찰사이었던 1898년엔 양사제에서 지금의 도응자리인 보선고(창고) 자리로 옮겼다가 다시 1903년에는 군영자리로, 1905년에는 집사청으로 이리저리 옮겨다닌 신세를 겪었다.

<첫10년은「구경」만>
『그 무렵이 신식학교로서는 「암흑시대」이었던모양이죠. 』전주토박이라는 유교장의말. 그럴것이, 1909년 (강희3년) 정규제1회본과 졸업생 6명이 나오기까지 10여년동안 학교는 그저「구경거리」처럼 생도들이 심심찮게 들랑거렸던 모양으로, 말하자면 긴 공백기간이 놓여있었다. 이때문에 졸업대장에 올려진 실지졸업회수는올해 59회째. 이무렵 전주에는 기독교가 이미 터를잡기 시작, 임영신여사가 제1회로 졸업한 여자청년학사 (현기독여자중고교)가 미국 남장노교선교사 「존·퀸」에의해 1904년 9월1일 창립됐다.
전주국민학교가 그나마 제면모를 갖추기는 1906년께. 본과1회 졸업생 6명중 유일의생존자인 소흥선씨(77·남노송동151·전한민당재정부장)가 초립동으로 입학한 것은 그가 열다섯살때. 그때만해도 자전거가 처음나타나. 당시 관찰사 이완용의 아들이 「양도롱테」라고 불렸던 자전거를 타고 다녔을땐 학교에 가다말고도 온종일 뒤를 졸랑졸랑 따라다녔다는 소씨의 얘기였다.
학교는 그해 통감 이등박문이내린 보통학교령에따라 전주공립소학교가 전주공립보통학교로 바꾸어진것같다고 기억했다. 지금 상무대터에에 신식교실 4개가 지어졌고 이듬해 (1907년) 초대교장에 전주사람 유춘희씨가 취임했다. 교감으론 일인 이정경부, 부훈도는 김제국, 전과부훈도에 이상노씨가 임명됐으며 교과과목도 새로 수신 국어 한문 일어 산술 도화 이과 체조로 바꿔졌다.

<상투잘리자 통곡>
일제가 일어를 가르치게 함으로써 드디어 식민지교육의 첫 그물을 펴던 때이기도했다. 소씨는 창가 도화를 가르친 김제국선생올 좋아했는데 산술 주판과 수신을 가르친 유교장은 풍채가 좋았고 수업시간에 갓을 벗어 꼭벽에 걸곤했다.
『어느날 일인의 성학에 유교장이 머리를 깎아 학교안이 어수선했던 일이 있었다』고 소씨는 그때를 생생히 더듬었다.
그는 입학한지 1년이 채못되어 상투머리를 댕강 잘렸는데 『잘린 머리를 집에 싸들고갔더니 할머니가 마루바닥을 치며 통곡했었다』고 그때일을 눈에 선하게 그렸다.
새로 나이많은 서당도령의 단기교육을 위해 지별보습생 45명도 이해에 뽑았다. 전국회의원유청씨(22회)의 선친인 유직양씨(작고·전한민당전배도당위장)가 「졸업증서 제1호」수령자.

<28세 1학년입학>
『아버지는 그때나이28세때보통학교에 들어갔답니다.』 유청씨가 아버지한테 들었다며 전했다.
같은 보습과출신중 유일의·생존자인 최승렬씨(78·전전북여객사장)는 장가든지 2년만인 17세때 학교에 들어갔는데 『1년배우고 나니까 과목이 시시해졌다』고했다. 호남선이 채 놓여지기전이어서 최씨가 경기고보 (지금경기중학)에 시험보러 갔을땐 하루종일「한밭」 (대전) 까지 말을타고 간다음 다시 기차를 갈아타고 서울에 갔었다. 지금 고향 익산군여산에서 와병중인 가람이병기씨와 조학렬(75·전주시서학동)씨가 제2회졸업생 52명중의 섕존자. 조씨는 『창가를 처음배웠는데 지금생각하면<여보여보거북님내말 들어보>이었던것같다』고노래를불러 보기까지했다.

<여선생엔 「호위」>
1909년 3월20일에는 여자부 학생을 처음 뽑았다. 신여성으로 경기녀고보까지 나왔던 서복주씨 (72·완주군상관면죽림리공덕부락)가5명졸업생중의생존자였다. 지금은백발의 할머니가된 서씨는 동학난에 전주에 피난해온 진사 서재수씨의 의동딸. 「아들노릇」을 하겠다는 극성에 못이겨 아버지가 입학을 못내 허락했다. 이름조차 없었는데 학교에 들어간 다음 선생님이 「복스럽게생겼다」해서 복주라 지어주었다. 양가집 처녀들은 아예 내외가 엄해서 서씨가 등교할 때는 꼭 우산을 쓰고 얼굴을 가리며다녔다. 처음 여자부는 남문안 박영근씨집 (전작대응)을 빌어썼으나 나중에 (1919년) 새교사를지어 분리되면서 지금 전주녀중고의 모체를 이루었다. 이때문에 전주 국민학교는 1923년다시 여자반을 뽑기까지 거의4년동안은 남자들만 학교를 다녔다. 새로 여자선생으로 일본사람 삼시송자가 처음 부임했다. 탕건쓴 남학생들이 하도 놀려대 여선생이 창가를 가르치러 수업시간에 들어 올때는 남자 선생이 그곁에서지켜섰다는그때얘기었다.
전주농림고등보통학교가 전주내의 중등학교로 처음 탄생한것도 이해. 일제때 독립투사로 10여년옥고를 치렀던 김봉빈씨(73·생존)가 3회, 초대 교육공로표창장을 받은 박정내(70·교육자)씨가 4회출신. 지금도 몸이건강한 최낙균씨 (69·6회·전전주수리조합리사)는체조를 좋아했지만 그때의 운동기구란 『철봉밖에없었다』고기억했다. 9회출신의 윤원상(68·변호사) 윤인상 (66·전대한증권거래소 이사장)씨 형제는 한반에 다니면서 싸움도 무척했지만 졸업후 서울로 진학할때는 나란히 이리까지 걸어가 기차를 타고 상경했다.

<부르면 기차멎어>
그무렵은 호남선이 겨우 부설됐을뿐, 전주에는 철도없던 때. 이리에서 경변철도를 끌어 운행을 시작한것은 1914년11월. 기차가 『땡 땡』거리며 처음 움직였을때 역두에는 이를구경하러나온백의의주민들이장을이루었다.
전북도내의 운수업을 개척한 최승렬씨 (1회)는 그때의 경변열차는 미처 발차시간에 못댄 손님이 멀리서 뒤쫓아나오며 『어이, 가만있어』소리치면 기차가 우뚝멈춰주기도 했다고 말하여 웃겼다. 1914년에는 전주제일공립보통학교로 이름이 바꿔졌다. 이뒤에 입학한 유철수(64·전주안과원장·12회) 이길수(65·전완주군교육감) 최석주(64·사법서사)씨는 12회 출실. 13회는 최재면(62·전도의원) 안진길(62·전전주시장)씨들. 『기 (체조)를하면 남·서문장꾼들이 우르르 학교담에 몰려 구경했죠.』 『우두를맞고 집에 돌아갔더니 할머니 어머니가 「조선사람 씨말린다」며 쌀뜨물로 우두자국을 씻어주었다』고 그때를 그렸다. 그무렵 유일의 기선생은 현공보부차관 이척성씨(26회)의 아버지인 이대윤씨. l5희의 최만흥씨(62·양조업)는 1학년다니다가 껑충뛰어 3학년으로 월반하기도.

<모교에온 유교장>
16회의 김갑수 (변호사) 석상옥 (전교통부장관) 유훈석 (현전주국민교교장) 김영창(화가)이주상 (전전주시장)들이 입학하던 때는 1919년의 만세직후. 이들은 신학제 6년제의 첫졸업생들이기도했다. 선친이 전주에서 변호사개업을 했기때문에 그곳에서학교를나오게됐다는김갑수씨는 지금도『입학하자 교장선생이 사람많이 모이는 곳에 가지말라고 했던일이 기억난다』고 했다. 37년간 교직에 재직중 지난65연도에 모교의교장으로 부임한 유씨는 『새삼 인생이 우습다』는 말. 학교에 다닐때 어찌 교장이되어 돌아오리라고 생각했겠느냐는것이다. 전주고등보통학교 (현전주고지) 가 개교된것도 이무렵. 17회 정진오씨(전북제사사장)가 졸업하던 해인1925넌 7윌21일, 학교는 현재의 전주시태평동재번지로 자리를 욺겨벽돌2층으로 지어졌다.
새교사에서 19회 출신의 이양호 (전내무차관) 위대봉 (서울은행전무) 이병호 (변호사) 지 연해 (전국회의원) 인주남 (전주 여상고교장) 유준복 (전전북도의회의장) 씨들이 졸업했다.이보다 한해 아랫반 송규섭 (20회한국상은상무) 김길남(20회·한국상은전주지점장)씨는 지금 공교롭게도 같은은행의간부들. 김영순 (전무주군수) 씨도20회였다. 그아래 임남수 (체신부차관) 김명엽 (여원사사장) 김희손 (공화당전주시당) 최택림 (전주전보청 기계과장)씨등이 21회 동창들. 내리 유청 (전국회의공) 이갑상 (조흥은항심사부장)씨가 22회, 이응우 (삼남일보사장) 씨가23회. 최응황 (변호사) 김경섭 (전북일보정치부장) 정선모 (서울공대교기)씨등이24회, 박노선 (국회의원) 간칠봉 (화가) 취연묵 (동아일보심의위원) 김규승 (성심여중고교장) 원영상 (전북일보사상무) 씨등이 25회로 이때가 가위 전주국민학교의 「골든· 에이지」였다.

<교사뺏겨 노천서>
이철상씨 (24회·전북도교위 문화계장)는 『그때만해도 여전히 담임선생은 총각인데 학생 (최성렬로기억)은 애아범이있었다』고. 이춘성 (공보차관) 유기탄 (삼화인쇄사사장) 유건수 (동사전무) 박문규 (여원사전무) 이정재 (한양대교수) 씨등이 26회, 이철승씨 (전국회의원) 도 동기였으나 2년때집이 이사가는 바람에 제이공립보통학교로 전학했다. 한해아래 조형호 (전북공무패교육원장) 씨가27회, 정회선 (정치과원장) 정회갑(서울음대교수) 씨가 28회, 온병종(췌산의원원장) 김재공 (김산부인과원장)씨등이 29회로 줄을이었다. 이어 30회는 최석남 (예비역준장) 전형내 (전주박물관장) 하희주 (시인) 이의왕 (화가)씨등. 이무렵부터 일제의 식민교육은 열을 올렸다. 1940년 창씨 명으로 졸업하게된 32회 유인상 (전주안과원장) 이문기(육군대령)씨등과 34회 임방현(한국일보논세위원) 35회 김철순 (호남흥산주식회사사장)씨등이 이때출신.『40년껜가, 학교실습지에서 고려자기화병과 쇠가마가나와발칵 뒤집혀진 일이있던것같다』고 기억했다.
8·15해방직전에는 전국 각국민학교에서도 가장 학생수가 많았던 학교이기도 했다. 1943년당시엔 학생수가 2천5백여명에 이르렀다고. 2차대전의 소용돌이속에선 대부분의 다른학교와 마찬가지로 일군한테 교사를 빼앗겨 「플라타너스」나무그늘밑에서 공부를 했다. 교정의 변두리면방공호를 파느라 어린손들에도 못이 밝혔고. 해방되던해 졸업반이던 이두형(37회·전주지법정읍지원간사), 그아래 하중희 (38회·KBS「프로듀서」), 이동화 (38회·전북일보논세위원)씨등은 『진절머리났다』던그무렵을생생히기억했다.

<동물원갖춘 교정>
해방되면서 1946년에는 현재의 이름 그대로 전주국민학교로 개명됐다. 해방이듬해의 입학생인 정정량양 (43회·전주문화방송국「아나운서」) 은 오랜 전통을지닌 이학교에선 병아리동문급. 『그때만해도 어린이들이 지금처럼 과외수업에 시달리거나 사치스럽지않았다』고 어른스레 말하기도. 태평동으로 이사올때 기념으로 심은 「히마라야시타」나무가 지금은 10미더 키높이로 하늘을찌른다. 교정엔 동물원도 새로꾸몄고 대지만도 8천1백평으로 넓혀졌다.개교 70돌을 맞은 작년 7월10일현재의 졸업생총수는 1만9천여명.『현재만도 65학급 4천8백명에 이르고있다』고 16대 유훈석교장은 말했다. 『튼튼하게 사이좋게 슬기롭게 자라자』 (생활목표) -학교가나이를 많이먹으니 세상도 달라졌고, 학교도 달라졌다.
이 「시리즈」에 참고가될만한 자료를가지신분은 본사사회부로 연락해주시면 감사하겠읍니다.
글 김석성 기자 사진 송영학 기자

<다음은 강능국민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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