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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E] 우정이 흔들리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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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우산을 나눠 쓴 세 명의 친구. 어깨가 비에 젖어 축축해져도 친구와 함께라면 즐거운 것이 바로 우정이다.

‘넌 우정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많아질 거야. 그때마다 너의 공부는 하루하루 뒤로 밀리겠지. 근데 어쩌지? 수능 날짜는 뒤로 밀리지 않아. 흔들리지 마, 친구는 너의 공부를 대신해주지 않아’. 무서운 과외 선생님이 보낸 문자 메시지 같은가요. 올 초 한 유명 입시학원에서 버스와 지하철에 내건 광고 문구입니다. 대학에 가야 하니까, 우정 같은 건 잠시 뒤로 미루라는 메시지가 서글프기만 합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고 외치는 아이들에게 “착각하지 마, 행복은 성적순이야”라고 가르치는 어른들. 왕따나 학교폭력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를 손가락질하기에 앞서 우정을 어떻게 가르쳐 왔는지 뒤돌아볼 일입니다.

충격과 공포. 신문을 통해 만난 교실의 풍경입니다. 학교를 다룬 기사에는 온통 왕따·ADHD(주의력 결핍 과잉행동 장애)·반항·자살 등 극단적인 이야기뿐입니다. 특별한 사건을 다루는 게 언론의 특징이다 보니 자극적인 소재가 주로 보도됐겠지요. 하지만 신문 기사가 학교 이야기의 전부라고 받아들이는 독자라면 요즘 청소년을 괴물로 오해할 만합니다.

 최근 친구 사귀기나 우정을 주제로 한 기사가 눈에 띕니다. 방황하는 친구에게 다가가 상담해줬더니 친구는 제자리를 찾았고 나도 기쁘더라(중앙일보 2013년 4월 15일자 15면)는 내용부터, 학교폭력 가해자였던 학생이 숲 속 학교에서 휴식을 취하며 상생과 협동에 대해 배우고 나서 “친구에게 용서를 빌고 싶다”고 털어놨다는 사연도 있습니다. <중앙일보 2013년 4월 17일자 15면>

 희망적인 내용의 기사에 오히려 고개가 갸웃해집니다. 친구끼리 수다 떨며 고민을 털어놓고, 치고받고 싸운 뒤 화해하는 지극히 당연한 친구 관계가 이젠 신문에 실릴 만한 사건이 됐다니 놀랄 수밖에요.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청소년기를 학창 시절과 동의어로 사용하면서 모든 것을 제치고 공부할 때라고 강조할 때 주로 이 말을 인용하죠. 심지어 친구와의 우정도 대학 간 뒤로 미루라며 아이들 등을 떠밉니다.

 하지만 청소년기를 진정으로 풍요롭게 만들어 주는 건 책상 앞 공부보다 다양한 친구와의 만남입니다. 공부는 나이 들어 다시 시작할 수 있지만, 평생을 함께할 친구와 우정을 쌓는 일은 어린 시절이 아니면 힘든 게 사실이니까요. 나이가 들수록 나와 세계관이 다른 사람, 경제적 계급이 다른 사람, 미적 취향이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게 점점 불편해진다는 데 많은 사람이 공감할 겁니다. <중앙일보 2013년 2월 1일자 혁신의 공간>

 죽음을 앞둔 이들이 가장 후회하는 일이 우정을 잃은 것, 남의 기대에 부응하느라 자신에게 솔직한 삶을 살지 못한 것이라고 합니다. 교과서는 청소년들에게 후회 없는 인생을 가르쳐주고 있을까요. 교과서에 담긴 친구와의 우정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봤습니다.

공부는 수단일 뿐, 삶의 목적은 아니랍니다

내 슬픔을 등에 지고 가는 자. 중1 도덕 교과서 서문에 등장하는 친구에 대한 정의입니다. 인디언들은 친구를 사귈 때 그가 나의 슬픔을 자기 등에 옮겨 짊어질 수 있을까를 헤아려 본다고 합니다. 내가 누군가의 친구가 돼 줄 때도 같은 무게의 책임감을 느끼죠.

 슬픔을 나눠 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친구가 힘든 일을 겪을 때 외면하지 않고 그 곁을 지켜준다는 뜻일 겁니다. 왕따를 당하는 친구에게 용기 있게 다가가 손을 내밀어 주는 것도 한 예가 될 수 있겠죠. 나도 같이 왕따를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친구가 겪는 고통을 함께 나눌 때 비로소 진정한 우정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같은 교과서에 이런 내용도 나옵니다. 친구란 밤 10시에 자동차 트렁크에 시체를 넣고 찾아가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며 하소연할 때 그 이야기를 잠자코 들어주는 사람이라고요.

 어떤가요. 친구 사이가 그저 좋아하는 연예인 이야기로 밤새 수다를 떨고, 매점에 같이 가서 빵 나눠 먹는 정도의 가벼운 관계가 아니란 사실이 느껴지나요. 이처럼 우정이란 애국이나 효도 못지않게 반드시 지켜야 할 가치 있고 아름다운 덕목이랍니다.

 고사성어에도 참다운 우정을 기리는 내용이 적지 않지요. 대표적인 게 관포지교(管鮑之交)입니다. 관중과 포숙아의 사귐이라는 뜻인데요. 친구 사이였던 이 둘은 먼저 상대의 형편을 헤아리고 배려하며 아름다운 우정을 쌓아 갑니다. 평시는 물론이고 전쟁터에서도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상대를 구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포숙아가 먼저 죽자 관중은 그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이런 말을 남깁니다. “나를 낳아준 이는 부모지만, 진정으로 나를 이해한 사람은 포숙아였다”고요.

 관포지교의 한국판이라고 할 만한 이야기가 중2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습니다. 성삼이와 덕재의 우정을 다룬 황순원의 ‘학’이라는 단편소설인데요. 한국전쟁 동안 성삼이는 국군 편에, 덕재는 인민군 편에 서게 됩니다. 전쟁의 소용돌이가 지나가고 총살형에 처해질 덕재를 호송하는 임무를 성삼이가 맡게 되죠. 호송길에 성삼이는 덕재가 인민군 아래서 농민동맹 부위원장을 맡을 수밖에 없었던 사정에 대해 듣게 됩니다. 그리고 친구 손에 묶인 포승줄을 풀어주고 학 사냥을 하자며 덕재를 보내주지요. 친구의 입장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공감하게 되자 이후 자신에게 닥칠 일을 개의치 않고 친구를 살린 겁니다.

 요즘 교실에서 이런 우정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우정보다 성적 관리가 제1 목표가 됐고, 친구를 돌아볼 시간에 영어 단어장을 한번 더 들춰 보는 게 학생의 본분인 양 여겨지는 분위기 탓입니다. 고등학교 사회문화 교과서에서는 근대화 이후 등장한 개인주의와 다원주의를 우정이 실종한 원인으로 꼽고 있습니다. 교과서에서는 집단을 특징에 따라 크게 1차 집단과 2차 집단으로 나눈다고 설명합니다. 1차 집단의 대표적인 예는 가족입니다. 집단이 구성된 목적 자체가 인격적이고 친밀한 정서를 나누기 위해서지요. 구성원은 친밀하고 사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으로 대체할 수 없다는 게 특징입니다.

 반면 근대화 이후에 등장한 2차 집단은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형성한 단체를 말합니다. 이윤 창출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회사가 대표적이지요. 구성원끼리도 편의적이고 계약적인 관계를 맺으며, 업무 효율성을 위해 사람을 대체하는 게 얼마든지 가능한 조직입니다.

 이전까지만 해도 학교는 또래 친구가 모인 1차 집단의 성격이 강했지요. 하지만 최근에는 특정한 목적, 즉 진학을 위해 의도적으로 결성된 2차 조직일 뿐 사적이고 친밀한 관계는 사라지고 있다는 얘깁니다. 정보 산업이 발달하면서 가족마저도 각자의 편의와 목적에 따라 쉽게 만나고 헤어지는 2차 집단으로 변모하고 있는 것 같아 섬뜩한 느낌마저 듭니다.

 

공부를 잘하고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것은 삶에서 거쳐야 할 관문이자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우리가 정작 추구해야 할 삶의 목적은 남을 위한 헌신과 희생정신에 있지요. 친구를 위해 희생하는 우정은 미뤄두고, 공부에만 매진하라는 어른들의 가르침은 교육의 목적과 수단이 뒤바뀐 대표적인 예가 아닐까요.

정리=박형수 기자
※집필=명덕외고 김영민(국어)·한민석(사회) 교사, 양강중 김지연(역사)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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