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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임을 위한… ' 논란에 묻힌 박근혜 통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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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허진
정치국제부문 기자

박근혜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능선에 오를 때마다 호남(湖南)을 찾았다. 2004년 4월 총선을 앞두고 당시 한나라당 대표이던 박 대통령이 첫 방문지로 택한 게 광주였다. 당시 5·18 묘역을 찾은 그는 “한나라당 지지도가 가장 낮은 광주에서 사랑을 받기 위해 왔다”고 말했다. 지난 대선 때도 호남에 공을 들였다. 새누리당 대선 후보로 선출된 다음 날 현충원을 찾아 김대중 전 대통령 묘역에 들러 예를 갖췄다.

 박 대통령이 호남에 공을 들이는 건 지역균형 발전과 국민 대통합이란 메시지를 부각하기 위해서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그는 지난 대선 때 호남에서 두 자릿수 득표(10.5%)를 기록했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 이후 역대 보수진영 후보 중 호남에서 두 자릿수를 넘긴 건 박 대통령이 처음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18일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열린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했다. 현직 대통령이 5·18 기념식에 참석한 것은 5년 만이다. 기념식이 열리기 전 행방불명자 묘역을 방문한 박 대통령이 한 묘비 앞에서 추모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이 열린 지난 18일 박 대통령이 광주를 찾았다. 2008년 이명박 전 대통령 이래 현직 대통령으론 5년 만이다. 박 대통령 개인으로는 한나라당 부총재이던 2000년 이후 10번째 5·18 묘역 참배였다. 그는 기념사를 통해 “5·18 정신이 국민통합과 국민행복으로 승화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영호남의 지역 갈등,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의 갈등을 봉합하지 않고서는 더 큰 국민행복을 이룰 수 없다는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다. 출범을 앞두고 있는 박근혜정부의 3대 국정과제 위원회(지역발전·청년·국민대통합위)의 방점도 ‘통합’에 있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날 행사는 ‘반쪽의 기념식’으로 끝났다. 국가보훈처가 ‘임을 위한 행진곡’을 공식 기념곡으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하자 5·18 관련 단체와 유가족 등 행사의 주인공이 불참해 ‘반쪽짜리’로 치러졌다. 이들 중 100여 명은 기념식에 앞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며 정부 조치에 항의하기도 했다. 기념식에서 박 대통령은 합창단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자 강운태 광주시장으로부터 태극기를 건네받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를 같이했던 여야 정치인 중 일부는 노래를 따라 불렀고 일부는 제창하지 않았다.

 5·18 기념식은 희생자에 대한 추모와 이에 대한 상처를 치유하고 다 함께 통합의 미래로 나가자는 데 방점이 있다. 오랫동안 민주화운동의 상징으로 불려온 ‘임을 위한 행진곡’을 갑자기 대체하겠다고 나선 보훈처의 탁상행정이 근본적인 문제지만 정치권이 도를 넘는 논쟁을 벌인 것도 성숙한 태도는 아니다. 민주당 강기정 의원과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표 등이 제창 문제로 불참한 건 모처럼 만들어진 통합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격이어서 아쉬움이 남는다. 이제까지의 행보에 비춰보면 내년 기념식에 박 대통령이 또다시 참석할 가능성이 크다. 그때는 노래를 불렀느냐 가 아니라 박근혜정부의 국민대통합 의지가 과연 제대로 실천되고 있는지를 두고 논쟁이 오가는 성숙된 5·18 기념식을 기대해본다.

허진 정치국제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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