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진중권의 책 읽는 인간] 디지털 포르노 … 현대를 읽는 '또 하나의 지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9면

[사진 그린비]

포르노 이슈: 포르노로 할 수 있는 일곱 가지 이야기
몸문화연구소 엮음
그린비, 336쪽, 2만원

“어이, 학생들, 좋은 거 있는데, 볼래?”

 플레이보이·펜트하우스·스완 같은 미국 잡지에서부터 강도가 높은 일본의 만화와 성행위의 교성을 녹음한 테이프까지, 학창 시절 서울 세운상가에는 없는 게 없었다. 경영 마인드를 갖춘 친구들은 여기서 도매가로 구입한 교재를 학교에 소매가로 공급하곤 했다.

 디지털 기술은 포르노 문화에 새로운 차원을 열었다. 얼마 전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으로 ‘야동’을 감상하는 남자의 동영상이 인터넷에 올라왔다. 오늘날 포르노는 이렇게 언제 어디서라도 접근 가능한 ‘정보’가 됐다. 인터넷으로 오가는 정보 중에 가장 많은 용량을 차지하는 것이 포르노. ‘토탈 스크린’은 ‘토탈 포르노’로 귀결된다.

 “네 컴퓨터 하드에 야동 한 편 없는 자만 돌을 들라.”

 야동이 사회적 문제가 될 때마다 회자되는 이 농담은 포르노의 편재성을 보여준다. 포르노는 우리 생활에 깊숙이 들어와 있으나, 그 동안 사회적 담론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포르노 이슈』에 참여한 저자 7명은 이 묻혀버린 이슈를 끄집어내어, 진화심리학·법학·정신분석학 등 다양한 관점에서 분석의 메스를 들이댄다. 왜 우리는 포르노에 빠져드는 것일까.

 장대익(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에 따르면, “뇌의 관점에서는 포르노 시청이 곧 포르노 행위가 된다.” 그는 진화심리학을 원용하여 포르노를 리처드 도킨스가 말한 ‘밈’(meme), 즉 일종의 문화적 유전자로 규정한 후 “거울뉴런계가 포르노를 향유한다기보다 오히려 포르노 밈이 우리의 거울뉴런계를 갈취한다”는 다소 이색적인 주장을 제시한다. 프로노 확산의 수혜자는 인간이 아니라 포르노 밈 자신이라는 것이다.

 이기적 유전자가 자신의 보존과 증식을 위해 개체를 이용하듯이, 포르노 밈도 자신의 보존과 증식을 위해 포르노 향유자의 거울 뉴런계를 착취한다. 결국 포르노를 향유하는 인간은 욕망의 ‘주체’가 아니라, 문화적 유전자에 이용당하는 ‘객체’로 전락하는 셈이다. 여기서 진화심리학은 묘하게도 주체의 행위를 구조의 효과로 환원시키는 구조주의 담론에 접근한다.

 다른 저자들은 포르노의 분석에 대개 포스트구조주의 미디어론과 포스트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을 원용한다. 소설가 김운하는 포르노를 즐기는 이들을 “데카르트적 향유 주체”라 부른다. 육체와 분리된 정신의 상태로 “가상현실 속에서 자기 자신만을 마주하는 세계”에 살기 때문이다.

 가상과 현실이 뇌 속에서 하나로 통합되는 시대에 포르노는 일종의 매트릭스가 되고, 그 속에서 성생활은 “포르노의 단계를 넘어선 판타지의 단계”로 들어선다.

 김종갑(건국대 영문과 교수)은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를 원용, 포르노에 대한 열망을 “실재를 향한 열정”으로 읽는다. 모더니즘이 ‘재현’을 문제시한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실재’를 문제시한다. 가짜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현대인은 실재에 강박적으로 집착한다. 포르노 속에서 이 실재를 향한 강박은 실재를 내파시킨다. 우리는 카메라로 여성 성기의 내부까지 들여다보나, 그때 여성의 신체는 점액과 살점으로 해체돼 사라져 버린다.

 김석(건국대 자율전공학부 교수)은 라캉의 정신분석학에 의뢰하여 주이상스(쾌락)의 대상으로 여성의 신체를 크게 원초적 대상으로서 물(物), 애착과 금지의 대상으로서 오브젝트, 마광수 교수가 좋아하는 페티시로 구별한다. “여성의 몸에 집착할수록 좌절은 더 커지지만, 포르노는 이 좌절을 더 큰 욕망으로 부풀리면서 인간을 소외시킨다”고 했다. 절대적 쾌락의 욕망은 영원히 미끄러질 수밖에 없기에 포르노 향유자는 불행한 주체다.

 이처럼 잘 정립된 기존의 방법론을 동원하는 것은 깊이를 더해주는 장점이 있으나, 동시에 그 분석에 이론의 부하(theory-laden)가 걸린 것 같은 느낌을 줄 수가 있다. 저자들은 대체로 포르노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한다.

 하지만 포르노의 너머에 과연 되찾아야 할 ‘본래의 성’이나 회복해야 할 ‘진정한 에로티시즘’이란 게 따로 있을까. 포르노에 대한 부정은 왠지 라캉을 사목 권력으로 세워놓은 느낌을 준다.

 계몽시대 이후 지성계에서는 포르노가 ‘성적 해방’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오늘날처럼 포르노가 더 이상 금지되지 않고 외려 자본주의적 ‘이윤추구’의 도구로 권장되는 시대에는 포르노를 바라보는 시각도 비판적으로 바뀔 수밖에 없다.

 이 시점에서 다시 포르노를 긍정하는 담론은 없을까. 그것도 과거처럼 그 무언가(가령 해방)의 ‘상징’으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인정하는 길은.

 이 대목에서 흥미를 끄는 것은 이은정(동국대·강남대 철학 강의교수)의 글이었다. 그의 글에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포르노를 허하라, 여자에게도”라는 다수 상투적인 주장이 아니라, “쾌락은 성적이지 않고 관능적”이라는 명제다. 성적 쾌락은 “성(sexuality)이 아닌, 근원적이며 내재적인 힘으로서 관능(sensuality)과 관계한다.” 프로이트의 말대로 성적 쾌락에서 중요한 것이 대상이 아니라 충동이라면, 포르노를 바라보는 시각에도 근본적인 변화가 생길 수밖에 없다.

 성욕이 목적어를 요하는 타동사가 아니라 목적어가 없는 자동사라면, 포르노는 가상적 대리물을 통해 욕망을 허구적으로 실현하는 매트릭스의 꿈이나, 더 강한 허구적 자극을 쫓는 가운데에 더욱 더 목말라지는 탄탈로스(제우스의 아들로 여러 가지 도발적인 행위를 저지른 죄로 지옥에서 벌을 받음)의 활동이 아니라, 그 자체로 독립적인 의미를 갖는 ‘관능’의 활동이 될 것이다. 포르노에 중독된 소수가 아니라 포르노를 즐기는 대다수의 경험에 부합하는 것은 바로 이 분석으로 보인다.

●진중권 동양대 교수. 문화비평가. 미학자.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미학과 언어철학을 공부했다. 저서 『생각의 지도』 『미학 오디세이』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등.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