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한잡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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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경칩날 아침. 닫혔던 창문을 열어 젖히니 환한 봄기운이 천지에 가득 차 있는 느낌이었다. 개구리도 하품한다는 날. 우리라고 그대로 있을 수 있느냐는데 순식간에 의견의 일치를 본 몇 산꾼들과 수락산으로 금년 첫 등산을 나서기로 했다.
겨우내 벽에 매달려있던 「룩색」을 내려서 먼지를 털고 반합(飯盒)이다 물통이다 장비를 하나하나 차려 넣는 기쁨. 오랜만에 등산화의 끈을 매고 산차림으로 나서니 날아 갈 것같이 상쾌하다. 『금년부터는 나도 함께 산에 다닌다』고 떼를 쓰며 따라 나서는 막내딸을 막을 도리가 없어 붙여주기로 했다.
내원암골짜기의 폭포물은 얼음 밑에서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있었고 먼데 동쪽으로 흰눈을 인 아련한 산봉우리(아마도 용문산인가)위에는 파란 하늘이 봄을 가득 담고있다.
암자 다리 못미쳐 넓은 바위에 솥을 걸고 살림을 차리기로 했다. 가랑잎을 피우며 연기때문에 한창 눈물을 홀리고 있는데 언제 나타났는지 군인 다섯이 우리들을 삑 둘러서더니 신분증을 제시하라 한다.
한여자도 신분증을 가진 사람이 없어서 쩔쩔매다가 지갑 밑에 들었던 어느 백화점의 시효지난 경품권으로 대신하는 수밖에 없었다. 여간첩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었는지 그들은 물러갔다.
다음날 아침. 마치 우리들의 수락산행을 꾸짖기나 하듯이 주먹만한 글자로「입산금지」 의 명령이 조간신문에 실렸다. 『…이곳에서 서성대는 수상한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발포하겠음』. 「처벌하겠음」이 아니라 대뜸 발포하겠다니 이제 산에 가기는 다 틀렸다고 산꾼들은 울상을 짓는다. 사실 한주일에 하루 등산을 즐기는 사람들은 <추억에 사홀, 기대에 사흘>을 산다고 할 만큼 생활의 보람과 힘의 원천을 산에서 찾는 것이다. 말하자면 산에 하루 다녀온 힘으로 엿새를 살아내고, 또다시 산에 가서 거리의 때를 깨끗이 씻어버리고 재생의 기쁨을 안고 돌아오는 것이다. 거리를 다니다가도 멀리 북한산 아련한 봉우리를 쳐다보면 눈물이 왈칵 솟구칠 만큼 산꾼들은 산을 그리워한다. 높은곳, 깨끗한 곳 ,성스러운 곳. 이젠 산에도 쉽사리 못가게 되었으니 더욱 그리움은 간절하다. 아, 멀지않아 산에는 진달래가 필텐데…. 이남덕<이대교수·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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