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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사위 결정만으로 국가배상 인정되는 것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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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본지 4월 29일자 1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진실 규명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법원에서 충분한 사실관계 규명 없이 국가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은 또 과거사 관련 소송은 과거사위원회에 진실 규명을 신청했던 사람만 가능하다고 선을 그었다. 과거사 관련 피해배상액이 연간 1000억원을 넘어섰다는 지적(중앙일보 4월 29일자 1·4·5면)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박병대 대법관)는 16일 진도 국민보도연맹 사건에 연루돼 희생된 박모씨와 곽모씨 유족 7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유족들에게 1인당 1300만~8800만원을 지급하라”고 결정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광주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박씨와 곽씨는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진도를 점령한 인민군에 부역을 했다는 혐의로 경찰에 연행된 뒤 사살됐다. 유족들은 2006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진실 규명을 신청했고 위원회로부터 “적법 절차 없이 끌려가 사살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결정을 받았다. 이를 근거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해 1·2심 모두 승소했다.

 대법원은 재판의 주요 쟁점에 대한 판단에 앞서 “과거사 관련 국가배상 소송에서 과거사위원회의 조사보고서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유력한 증거자료”라고 인정했다. 하지만 “위원회의 진실 규명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신빙성 등에 대한 심사도 없이 대상자 모두를 국가에 의한 희생자라고 확정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지금까지 법원은 과거사위의 진실 규명 결정문을 받은 경우 별도의 사실관계 확인 없이 피해자로 인정해 줬다. 그러나 정부는 “과거사위원회가 개별 피해자들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판단하지는 못한 만큼 최소한 재판 과정에서 사실관계는 따져 봐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이런 논란에 대해 대법원이 정부 측 손을 들어 준 셈이다.

그러나 이인복·이상훈·김용덕·김소영 대법관은 소수의견을 냈다. 이들은 “과거사위의 결정은 증명력이 매우 높다고 봐야 하며 이를 뒤집을 수 있는 증명은 국가의 책임”이라며 반대 입장을 밝혔다.

 배상청구 자격과 관련해 재판부는 “국가가 과거사정리 기본법을 만들어 배상해 주겠다고 밝힌 이상 위원회로부터 진실 규명 결정을 받은 피해자는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고 정리했다. 하지만 “과거사정리법 적용대상인데도 진실 규명 신청조차 하지 않았다면 배상청구를 할 자격이 없다”고 한계를 정했다.

과거사정리법은 진실 규명 대상을 군사정권 시절 민주화운동은 물론이고 한국전쟁과 일제강점기 이전의 국가 불법행위까지로 규정해 사실상 범위를 넓혀 놨다는 지적을 받았다. 이 때문에 국가배상 소송의 제한도 없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적지 않았다.

국민보도연맹 사건은 피해자만 30만~100만 명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날 판결로 피해자 중 과거사위원회의 진실 규명 결정을 받은 사람만 소송이 가능해졌다. 2010년 말 활동을 마친 과거사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위원회가 진실 규명 결정을 내린 사건은 모두 8479건이다. 이에 대해 박용현 한국전쟁유족회 운영위원장은 “여전히 두려워서, 또는 시간이 없어 진실 규명을 요청하지 못한 피해자가 많다”며 “이런 피해자들의 한을 풀어 줄 추가적인 조치가 꼭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한편 재판부는 “사건이 발생한 지 오래됐지만 피해자들이 과거사위 결정 전까지는 배상을 요구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아니었다”는 이유로 소송을 낼 수 있는 시효가 지났다는 정부 측 주장을 기각했다. 위자료 규모에 대해서도 “60년이나 흘렀고 피해자 숫자가 많은 특수한 사정상 피해자들 간 형평도 중요하다”며 “해당 판결이 다른 판결에 비해 다소 많은 위자료를 인정했지만 재량권을 넘었다고 판단할 정도는 아니다”며 원심대로 확정했다. 윤성식 대법원 대변인은 “그동안 하급심 판결마다 위자료 결정 시 편차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라며 “이번 판결로 법원별 위자료 편차가 상당히 완화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현철 기자

◆국민보도연맹(國民保導聯盟) 사건

- 개요 : 한국전쟁 중 국군·경찰·반공극우단체 등이 “인민군에 부역했다”며 ‘국민보도연맹’ 조직원들을 집단 학살한 사건. 보도연맹은 이승만 정부가 1948년 좌익 활동 전력자를 계도한다는 취지로 설립

- 대상 : 30만~100만 명(추산)

- 진상 조사 : 과거사정리위원회, 2009년 11월 “한국전쟁 기간 대한민국 정부 주도로 국민보도연맹원 4934명이 희생된 사실을 확인했다”발표

- 관련 소송 : 대법원, 지난해 8월 울산보도연맹 사건으로 희생된 유가족 482명에게 국가 배상책임 인정. 또 오창 보도연맹 사건 유족 492명에게도 배상 책임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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