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이농민도 돌아와 쟁기를 챙기고…|잔설비집고 발돋움하는 「희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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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봄은 보리, 보리는 생명을 상징한다.
작년에 흑심한 가뭄으로 쌀한물 거두지 못해 긴 겨울을 밀가루 죽으로 이어온 한해지력의 봄은 새파란 보리싹과 함께 모두가 「희망」에 찬다.
횐 눈이 스르르 녹아내리자 눈밑에서 파란 보리가 발돋움 한다.
열매를 맷지 못한 볏짚을 불사르고 갈아 엎고 심은 보리가 싹이 돋아난 것이다. 희망이다.
양지바른 처마에서 고드름이 녹아내린다. 25마지기의 논에서 쌀한톨 건지지못하고 빈손을털고 주저않았던 조원일씨(무안군일로면 옹산리6구)는 이제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봄시샘하는 눈이 아직 마당구석에 남아있기는해도 헛간에서 겨우내 잠잔 쟁기를 끌어내 손질을한다.
곧 보리를 밟고 중경을 해야한다. 방안에서 「병집만들기」, 아낙네들은 「홀치기」를 부업으로 해봤지만 아낙네의 손은 손가락마디가 굵어 「홀치기」가 적합치않았고 남자들의 「병집만들기」는 엉덩이가 쑤셔서 겨울이 지겨웠다.
『역시 들일을 가야지…』 한치쯤 자랐을 보리에 생명의 모든것을 기대하고 있다. 용산리6구에는 36가구가 산다. 걱정은 작년에 6마리있던 소가 2마리로 줄어든것. 4마리는 팔아서 보리쌀로 바꾸었다. 올해는 밭갈 소가 모자라서 큰일이라는 것이지만 호미라도 땅을 파서 일구겠다고 기염이 대단. 어린들의 노래도 소박한 소원에 찼다. 『비야 내려라 보리야 자라라, 풍년이야 들어라』-비 내리라는 것이 입버릇처럼 됐다고 조씨는 어린딸을 보면서 히죽이 웃는다.
지난해 이마을에서 고향을등진 사람은 세사람-서울로 벌이를갔다. 다신 농사를 안짓겠다면서 쟁기를 버리고 땅을 등져섰다. 하지만 날이 풀리자 그중 두사람이 고향에 오겠다고 면사무소에 알려왔단다. 『그사람 꼭 올줄알았어요-. 먹을것 없어서 땅 버렸지 농사가 싫어서 간것 아니여-.』
봄은 땅을 버리고갔던 일꾼을 부르고 마을사람에게는 고향을 등진 이웃을 기다리는 애틋한 마음씨를 심어주고….
쟁기를 손질하는 손끝에 봄이 숨쉬고 있다.
글 김경욱
사진 김준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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