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남윤호의 시시각각

버티려다간 부러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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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남윤호
논설위원

재료공학에 resilience라는 용어가 있다. 복원력이라고 한다. 충격이 가해져도 부러지지 않고 원래 형태로 되돌아오려는 힘을 말한다. 이게 요즘엔 심리·건축·방재·경영·조직 등 다방면에서 사용되고 있다. 각각의 용도는 달라도 원상회복이라는 기본 개념은 같다.

 어렵게 생각할 거 없다. 낭창낭창한 버드나무 가지를 떠올리면 된다. 바람에 휘긴 해도 곧 제자리로 돌아온다. 딱딱하면 센 바람에 부러지기 쉽다. 조직도 마찬가지다. 경직된 의식과 체질은 겉으론 강해 보이지만 충격에 약하다. 버들가지처럼 유연해야 충격을 흡수하고 신속히 원래 기능을 회복할 수 있다.

 그래서 경영학자들은 복원력이 강한 기업조직을 강조한다. 예기치 않은 위기에 빠졌어도 생산·서비스 활동을 신속히 정상화시킬 역량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맷집과는 다른 개념이다. 여기저기서 잇따라 터져 나온 추문도 그런 관점에서 볼 수 있다. 폭행과 막말, 그리고 추행에 이르기까지 개탄과 규탄만 할 일이 아니다.

 기업이든 정부든 언제, 어디서, 어떤 타격을 받을지 모른다. 예컨대 ‘라면 상무’는 다른 기업에서 ‘김밥 상무’ ‘짜장 전무’로 변형돼 나올지도 모른다. ‘막말 우유’ 역시 그렇다. 대리점 방식의 영업을 하는 수많은 소비재에 ‘막말’이라는 수식어가 붙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상상하긴 싫지만 제2, 제3의 윤창중도 배제하기 어렵다. 우쭐한 권력의식, 밖에 나왔다는 해방감, 약자에 대한 우월감, 그리고 얄팍한 이성의 제어력을 마비시키는 알콜…. 인성에 결함이 있는 이가 쥐꼬리만한 힘이라도 쥔다면 사고 칠 위험은 활짝 열린 셈이다.

 하지만 어느 조직에서나 위험인자를 100% 걸러낸 살균 인사를 하기는 불가능하다. 미리 술 먹여 보고 정신줄 놓는지 체크해 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런 가능성을 아예 없애는 게 가장 이상적이지만, 만의 하나 사고가 났을 때 잘 수습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중요하다. 복원력은 후자와 직결된 문제다.

 그 첫 단계는 사태 파악이다. ‘막말 우유’의 경우 사태 파악이 좀 늦었다고도 하지만, 윤창중 사건에 비하면 양호한 편이다. 결과론이지만 윤창중 본인은 물론 청와대가 상황을 너무 가볍게 보지 않았나 싶다. 만약 오바마 대통령의 방한 도중 백악관 대변인이 비슷한 사건으로 서둘러 출국했다면 어찌 됐을까. 이게 보통 일인가.

 큰일 나겠다 싶으면 대응 수위를 넉넉히 높여 잡는 게 상식이다. ‘라면 상무’ 때는 모기업 회장까지 나서지 않았나. 또 ‘막말 우유’에 대해선 오너가 빠지긴 했지만 전문 경영진이 죽 나와 사과했다.

 이처럼 꽝 하고 사고가 터지면 일단 한 대 맞는 수밖에 없다. 그 다음에 쓸데없이 매를 벌지 않는 게 중요하다. 그러려면 잘 판단해야 한다. 감출 수 있거나 감춰도 되는 일인가, 당장 처리하지 않고 미룰 수 있는 사안인가, 실무선에서 처리하고 마무리 지어도 되는가, 책임은 어느 선까지 져야 하는가…. 이 판단을 그르치면 후폭풍을 낳는 법이다.

 특히 윗분에 누를 끼치면 안 된다는 절대 방어선을 먼저 쳐놓으면 대응이 경직되기 쉽다. ‘대통령께 사과 드린다’는 청와대의 자살골이 나온 것도 그런 이유 아닌가. ‘막말 우유’도 ‘라면 상무’도 자기네 회사 회장에게 사과한다곤 하지 않았다. 사과를 받은 대통령이 다시 사과를 했으니, 얼마나 어색해졌나. 대통령을 책임추궁의 사정권에서 대피시키려던 주관적 충정이 결국 객관적 불충이 되고 말았다.

 기업에 비해 청와대는 립서비스에서도 뒤졌다. ‘책임질 일이 있으면 책임지겠다’는 말은 윤창중식 표현으로 ‘영양가 없는 얘기’다. 한편으론 책임질 일 없다며 버틴다는 인상도 준다. 이 역시 유연한 사고의 결핍 탓 아니겠나. 강하게 버틸수록 강하게 부러진다. ‘라면 상무’ ‘막말 우유’ 그리고 윤창중은 우리 사회 도처의 경직성을 깨부수라는 경고다.

남윤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