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 두루마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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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고당 조만식선생의 85회 생신을 맞는다. 고당은 6·25동란 당시, 북한에서 살해되었다는 말도 있다. 누구도 확인할수 없는 주제에, 감히 별세했으리라는 불길한 생각만에 젖기는 어딘지 무던한 아쉬움이 앞선다. 같은 말이지만 「행방불명」이라면 마음이 조금은 놓인다.
고당은 해방뒤, 북한에서 민족주의 진영을 대표했다. 「모스크바」협상에서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죽기 살기로 반기를 휘두르고 나섰다. 46년2월 「로스께」(소군)에게 납치된 뒤로는 이제껏 소식이없다. 예감으로는 연령도 다하셨으니…하는 생각이든다.
고당이 즐겨 인용하던 문구가 생각난다. 『여는 한국에 일감이 그대로 숫으로 있는 것을 보고간다』고 한말이다. 영국신문계의 거두「필드」씨는 30년대에 우리나라를 돌아본 소감을 그렇게 피력했었다. 고당은『숫으로 남은 일감』 에 언제나 몸이 달아있었다.
『세계에서 한국청년처럼 다사한 청년은 다시 없다. 』
그분은 적어도 몇십년앞을 뚫고 내다보는 투시력이 있었다. 고당의 이말은 아직도 우리청년의 가슴을 울리는 명언이 됨직하다. 『세계에서 한국청년처럼 다사한 청년은 다시 없다. 』 지금 되뇌어 봐도 고당의 언중유골은 역사를 내다보는 혜안을 갖고있다.
오늘의 20대 청년치고 고당의 인품을 익히 알사람은 드물다. 작가 황순원씨는 언젠가 『남자라는것은 저렇듯 늙을수록 아름다울 수도 있는 것이로구나 하는걸 한두번 아니게 느꼈다』 는 말을 한적이 있있다. 바로 조만식선생의 풍모를두고 한이야기다. 「미니·두루마기」는 그 당시(1920년대) 벌써 고당이 창안(?) 한 신시대의 의상이었다.
회색 무명 바지저고리, 검정무명 두루마기, 검정 무명 버선, 그분의 의상은 언제나 변함이 없었다. 두루마기의 기장은 우릎위로 껑충 뛰어오르고, 저고리며 두루마기엔 치렁치렁한 고름대신 단추가달리고, 바지통이나 팔소매도「맘보」 까지는 안되지만 배가 부르지않아 활동적이었다. 그리고 운두가 낮은가죽신.
대저, 한 시대를 앞지르고 사는 사람은 어딘가 고집스러운 신념과 의지에 차있기 마련이다. 세상이 어수선할수록 고인의 풍채는 새삼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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