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전영택씨의 유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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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전영택선생은 우리가 일본서 중학교에 다닐적에 힘을 합해서「창조」라는 잡지를 낼때부터 사귄 선배요, 친구다.
맨처음 「창조」 잡지를 내려할적에 서로협의했던 동인들중에서 김백악 김동인 두분이 일찍 세상을 떠나고 이번에 「늘봄」까지 가니 이제 나혼자 남게되어 고적한감이 든다.
「늘봄」은 소설가로서 업적을 남겼지마는, 우리들 사이에서는 고결한 인격자로 또는 철저한 인도주의자(휴머니스트)로 가장 존경받는 존재였다. 일본유학을 다닐때 어느해에 「늘봄」은 어떤 눈먼 여학생을 서울서 「요꼬하마」의 맹아학교까지 데려다주는 임무를 맡았다. 「늘봄」이 그임무를 충실히 완수한것은 물론이나, 그 눈먼소녀가 「늘봄」의 친절과 인격에 반해서 사랑을 고백하는데는 「늘봄」도 한동안 난처했었다고 한다.
그는 목사로서, 종교지도자로서 일생을보냈으나 결코 어떤교파적「도그머」에 집착하지않고 자유스러운 태도를 견지한 것으로안다.
그는 여려편의 단편소설을 남겼고 그것은 편마다 구슬과 같은 광채를 가진 것이다.
종교인이라고해서 소설속에 종교적색채를 풍기지는 아니했다. 오직 인도주의적이요, 긍정적이라고하는데 그의 특색이 있을 것이다. 자연주의문학에서 기교주의로, 계급문학으로, 지성주의로 변천하는 40년 한국문단에서 처음부터 나중까지 인도주의적 문학관을 지켜나간것은 「늘봄」의 종교적 신앙의 소산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세상을 떠나는날, 그는 기독교의 분열상태를 합동으로 이끌기 위한 글을 써서 편집실로 전하고 전차를 타려하다가 참화를 당했다고한다.
그원고는 결국 그의일생의 마지막 글이 되겠지마는. 갈라진것을 다시 모으기 위한 그글은 마치 「늘봄」의 유언인것 같다. 종교계에대한 유언뿐이아니라 우리민족 전체에게 대한 그의 유언이라고 해도 무방할것이다.
「늘봄」은 인생의 가치를 긍정하고, 아무리 어두운 가운데서도 빛을 찾을수있다는 신념으로 생활했고, 가르쳤고, 또 소설을썼다. 한번도 노한 기색을 보인일이없는 그의 온화한 얼굴과 따뜻한인격, 부드러운 음성과 말씨,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조용히 엮는 그의강연-이 모든것이 이제 슬픈 기억으로만 남게 되었다.
그러나 남긴 글들- 인생에 대한 신념을 끝까지 간직하는 그의「신앙」의 글은 오래두고 새로운 세대의 마음의 영양이 될줄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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