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관 기자의 아하, 그렇군요] '울고 웃고' 약물로 조절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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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대학 학장을 지낸 K씨는 뇌졸중을 앓고 난 뒤 삶이 확 달라졌다. 평소 그는 근엄하고, 깐깐하기까지 했다. 그런 그가 웃음이 많아진 것이다. 대수롭지 않은 말에도 웃음이 터져나와 멈추질 못한다. 상대방의 기분이나 분위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툭하면 웃어버리니 주위 사람들이 오해하거나 황당해 하는 것은 당연했다. 웃음 때문에 병문안이나 상가는 아예 발길을 끊었다. 팔.다리의 후유증은 거의 사라져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이제 웃음 때문에 좌절한다.

뇌졸중 이후 슬픈 감정이 앞서는 사람도 있다. 목석 같은 사람이 드라마를 보면서 엉엉 울기도 한다. 울컥 하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는 환자도 있다. 점잖던 사람이 욕을 하고, 주먹질을 한다. 이런 갑작스러운 감정을 이해하지 못해 가족과 곧잘 충돌하기도 한다. 이들은 모두 충동조절장애자다. 뇌졸중으로 뇌가 망가져 인생이 바뀐 것이다.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이 발견된 것은 1948년의 일이다. 세로토닌을 찾아낸 미국의 모리스 래포츠는 이를 혈관 수축물질로 이해했다. 그러나 지금 과학계가 찾아낸 세로토닌 기능은 수십 가지에 이른다.

서울아산병원 김종성 교수(신경과)가 쓴 '춤추는 뇌'(사이언스 북스 출판)에는 세로토닌에 관한 재미난 얘기가 펼쳐진다.

"세로토닌은 생물이 진화하면서 작용범위를 넓혔다. 사회적 관계 설정, 예컨대 짝짓기, 다른 동료와 관계 맺기 등 고등동물이 될수록 복잡한 행동조절의 역할을 맡게 된 것 같다. 세로토닌 양이 적은 원숭이는 사회적인 계급이 낮다. 그런데 약물로 뇌의 세로토닌 양을 늘리면 사회적 계급이 바뀐다. 암컷으로부터 인기가 높아지고, 교미의 횟수도 많아진다." 신경전달물질에 의해 우리 자신의 행동.성격은 물론 운명까지 바꿀 수 있다는 얘기다.

감정의 급격한 변화를 겪는 뇌졸중 환자의 손상 부위는 주로 전두엽이나 기저핵.뇌간 쪽이다. 모두 세로토닌 수용체가 풍부한 부위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 환자에게 세로토닌을 공급하면 상황은 금세 달라진다. 울고 웃던 사람이 언제 그랬느냐는 듯 금방 점잖아진다. 약을 중단하면 다시 웃고 운다.

뇌속 호르몬인 바소프레신과 옥시토신에 대한 연구도 재미있다. 우리의 사랑을 지배하는 것이 실은 이들 호르몬의 장난(?)인 듯도 싶다. 뇌의 시상하부에서 분비되는 이 호르몬은 9개의 아미노산으로 이루어진 짧은 단백질이다.

미국 에머리대 래리 영 교수팀은 초원들쥐의 사랑 행태에 대해 연구했다. 들쥐들이 교미 후 상대 쥐에 대해 진한 애정표현을 하는 것을 보고 뇌속 호르몬의 변화를 살폈다. 그랬더니 수컷에선 바소프레신이, 암컷에선 옥시토신이 증가했다. 이번에는 교미를 하지 않은 들쥐에게 바소프레신을 주입했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암컷을 핥고 비벼대며 농후한 애정표현을 하는 것이다. 상대방에 대한 친밀감을 갖도록 이들 물질이 배후 조종을 하더란 얘기다.

분만 후 산모의 몸에선 옥시토신이 증가한다. 아기가 예뻐 끌어안고 힘든 육아에 매달리게 하는 모성애도 알고보면 옥시토신의 힘이다. 실제 옥시토신 분비를 억제했더니 새끼를 남의 애 쳐다보듯 차갑게 대하더라는 동물을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도 있다. 마음의 감기라고 하는 우울증도 실은 뇌의 신경전달물질이 만들어내는 질환일 뿐이다.

인간의 희로애락을 연출하는 것은 뇌다. 아직 과학은 뇌를 정복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신경전달물질을 합성해 감정을 바꿀 정도는 됐다. 의학은 이제 질병치료에서 인간의 감정까지도 다스릴 수 있는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고종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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