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향수의 첨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김장철이 다가 온다. 목돈을 지불해야하는 편에서는 마음이 무겁다. 어느 가계이고 이 초동의 두통을 겪지 않을수는 없다. 우리의 주변에서 월동비를 선뜻 주는 직장은 드물다.
그러나 이 무렵처럼 우리의 샐활속에서 풍류를 생각하게하는 계절도 없다. 그득히 김장독을 묻어놓고, 제맛의 돌기를 기다리는 마음은 다분히 「한국적인 향수」이다. 외국에 머무르는 사람들이 으레 「노스탤지어」에 잠기는 것은 모국의 미각에 대한 그리움때문일 것이다. 운동선수들이 해외출전에서 돌아와 감명깊에 이야기하는 것중에 하나는 역시 김치타령이다.
얼마전에 서울을 다녀간 세계적인 「바이얼리니스트」「아이작·스턴」은 첫입에 한국의 김치맛을 알아 보았다. 물론 김치의 맛을 음미할 정도로 그는 한국음식에 익숙해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빨간 깍두기를 입에 넣고도 얼굴을 찡그리거나, 질색을 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의례적인 자리도 아닌데 그는 야채가 그런맛으로 조미되는것에 경탄해 마지 않았다. 김치를 악취식으로 생각하는 미숙한국인은 좀 쑥스러워 질 이야기이다.
한국 토산종 무를 깨물때의 그 소박한 쾌감, 문득 한겨울의 식탁에서 느껴지는 미나리의 향기, 이름모를 해산물에서 풍기는 먼 바다냄새…. 김치의 맛은 요리사전에서도 찾을 수 없는 독특하고 미묘한 무엇을 함축하고 있다. 어느집이나 그 맛이 또한 일률적이 아닌, 집집마다 미각의 「뉘앙스」가 다른 그 섬세한 맛의 차이도 한결 풍류적이다.
조미료는 제외하고 기본재료로만 따져도 아마 10여종은 될 것이다. 「쌀겨」와 「다시마」가 필요한 김치가 있는가하면, 호박·갓·고춧잎등속까지도 동원된다.
학사 주부들이 교과서를 펴놓고 김장을 담그는 오늘의 시속은 어딘지 고향을 잃어가는 허전함마저 없지 않다. 만일 김장김치를 「캔」(통조림)으로 대신할 수 없을까를 궁리하는 주부가 있다면 미각에의 향수는 더욱 깊어진다. 주부들은 우리의 가장 아름다운 풍류적 미각을 지켜가는 최후의 첨병임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