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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경제의 변질과정|「볼세비키」혁명 50년의 소련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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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미국 「시라큐즈」대학의 「슈바루츠」교수는 「아메리컨·이코노믹·리뷰」라는 잡지에서 이러한 말을 한일이 있었다.
『미국에 있어서의 소련문제연구는 연구원자료의 부족 때문에 거의 등화관제 밑에 있는 거와 같다』고 술회한 일이 있었다.
하물며 우리에게 있어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도 『장래에 있어서 높은 대가를 치르지 않기 위해서는 연구』를 하지 않으면 아니 될 줄 생각한다.
1917년11월7일 소련은 「10월 혁명」을 가졌었다. 그네들은 혁명당초에 있어서 『빈농과 피목탈 대중과의 동맹』을 내세우고 『생산물의 사회적 생산과 분배의 통제』를 운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네들이 구상하였던 일이 그대로 실현될 수는 없었다. 혁명직후는 소위 『간섭과 내란의 시기』였기 때문이다. 외국의 무력간섭과 반혁명의 내란은 2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이 시기에 있어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정책의 양상은 중농의 중립화정책으로부터 중농과의 강력한 동맹정책으로 전환하였다는 점이다. 그것은 대내·대외적으로 위기에서 폭넓은 혁명의 주체를 형성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농업보다는「공업」으로>
그러나 1921년부터 25년 사이에는 「네에푸정책」으로 이행하였다. 소위 신 경제정책으로 불리어지는 이 정책은 혁명직후 내란과 봉쇄와 싸우기 위해서 전시공산주의를 내세웠지만 그것이 농민의 이익과 충돌되어 다시 전향한 정책이었다. 이 「네에푸」정책은 곡물의 강제미수를 시정하고 농민들에게 잉여농산물의 자유처분을 인정하였는가하면 또한 도시와 농촌에 있어서의 상업의 자유가 허용되었었다. 이러한 상업과 더불어서 임금노동을 고용할 수 있는 소공장의 사적경영도 인정하였다. 또 국영공장을 독립시켜 경제적 재산을 기초로 하는 독자적 경영을 하게 하였다. 이 「네에푸」정책에 의해서 그네들은 혁명전의 경제수준에 도달하게 되었었다. 서방진영의 열강들이 「공산주의의 파산」또는 「자본주의에의 항복」을 운위한 것도 바로 이때이다.
그러나 26년대에 이르러서는 『우리는 후퇴는 끝났다. 다시 제세력의 재편성이 필요할 때가 왔다』고 선언하는 동시에 사회주의 공업화와 농업의 집단화로 단계이행을 시작하였다. 말하자면 적극적인 사회주의 건설을 시작한 셈이다. 공업에 있어서는 생산수단을 생산하는 기초적 중공업의 발전, 농업에 있어서는 집단화라는 새로운 경영형태로 바꾸어 갔던 것이다. 『농업보다는 공업, 경공업보다는 중공업』이 이때의 구호였다. 그것은 사회주의화의 기조를 만들려는 그네들의 노력이다.
1928년부터는 제1차5개년 계획, 1933년부터는 제2차5개년 계획, 1938년부터는 제3차5개년 계획이라는 세 개의 5개년 계획을 세워 실천에 옮기었다.
이러한 계획을 수행함으로써 그네들은 『사회주의 사회는 근본적으로 건설되고 이제는 점차적으로 공산주의 단계로 이행』하게 되었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1931년에 있어서는 세계공업생산의 16%를 차지함으로써 49·3%를 차지하던 미국에 다음가는 제2위를 과시하기도하였다. 당시 독일이 12·3% 영국이 11·3% 불란서가 11·6%였기 때문이다. 이 기간동안에 그네들은 공업에 있어서의 생산수단의 생산부문 즉 중공업과 농업에 있어서의 사회주의적 형태 즉 「콜프즈」(Kolkhoz)와 「소포즈」(Sovhoz)를 급속히 발전시키었다.

<「리바만 방식」도입실천>
다음에는 독·소 전쟁의 시기이다. 그네들의 말을 빌린 다면은 소위 「조국전쟁」의 시기인 것이다. 이때는 소련의 최대의 시련기였다. 즉 쌓아올린 사회주의가 무너지느냐 또는 존재하느냐는 분기점이었다. 이렇게 소련경제의 실천과정을 보아오면 거기에는 체제 면에서 후진성·봉쇄성 그리고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성격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점은 그네들이 놓여져 있었던 역사적 여건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즉 그네들의 혁명이 지극히 뒤떨어졌던 후진적인 조건에서 출발했다는 점과 또 당시에 있어서는 적의에 찬 열강세력의 포위 하에 있었기 때문으로 안다.
그러나 2차대전후에 있어서는 문제가 달라졌다. 「스탈린」의 공업화강행 정책으로부터 현재의 「코시긴」정책에 이르는 과정은 새로운 양상을 띠고있다. 그네들의 혁명50년의 역사가운데서 「흐루시초프」와「코시진」은 확실히 새로운 전환점을 가져온 사람들이다. 「흐루시초프」의 「스탈린」비판과 평화공존론은 소련의 새로운 「이미지」를 내걸었던 것이고 「코시긴」의 경제개혁은 소련경제의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한 것이다.
소련은 현재 「리바만방식」의 도입이 실천되고 있다. 즉 이윤을 경제활동의 가장 중요한 자극의 하나로 하여 시장경제 기구를 점진적으로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또 얼마 전에 소련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인 「바이바고프」(Baibakov)가 말했듯이 앞으로 3년 동안에 소련은 7·9%의 중공업 성장률보다도 높은 8·6%의 소비재공업의 성장률을 책정하고 있다. 이러한 소련경제의 움직임은 서방진형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하나의 무혈혁명이 아닐 수 없다. 그네들은 지금 세계총생산의 20%를 점유하는가 하면 미국과 더불어서 선진적 과학기술의 경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소련은 더욱 『하나의 중앙계획당국과 다수의 공장』이 있었던 상태에서 『하나의 중앙계획당국과 다수의 기업』이 있는 상태로 바꾸어져갈 것이 예상된다. 말하자면 생산력발전의 저해를 이윤도입과 시장기구의 채택에 의해서 극복하려는 노력이 점점 증대될 것이라는 말이다.
현재 소련에서는 공업생산의 3분의1을 점유하는 약6천개의 기업이 이윤원칙을 도입하고 있는 것이다.

<국내에 6천 개의 기업>
끝으로 UPI에 「모스크바」지국장인 「샤피로」의 말을 인용하여 결론을 맺을까 한다. 『소련은 1917년에 제1의 혁명을 가졌고, 29년에는 농업집단화라는 제2의 혁명을, 그리고 「스탈린」사후에 자유화라는 제3의 혁명을 가졌다. 지금 또 제4의 혁명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경제개혁은 어디까지나 사회주의체제 내에서의 개혁이고 경제관리 방법의 개선이다. 따라서 국가통제의 기본원칙이 변화하지 않는 한 자본주의의 부활이라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조동필<고대정경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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