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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격자는 많은데|방향잃은 장님 수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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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잡힌다"던 범인은 벌써 10일이 넘도록 안잡히고 있다. 방향을 잃어버린 근하군 살해범 수사는 아직도 「제로」지대-살인의 필수요건이라는 인과관계가 도무지 안떠오른다. 피살자에게 원인이 있다면 수월하게 풀려 나가겠지만 그 부모와 가정에 원인이 있다고 밖에 볼 수 없는 「소년살해사건」이기 때문에 피살자 가족들의 절대적인 협조없인 방향설정이 안된다.
27일까지의 검·경의 수사「미스」, 그리고 진전을 보면 경찰은 밀수보상금에 눈이 어두운 광복파출소 근무 백일채 순경의 허튼 수작때문에 범인의 「현행범 체포」란 공을 놓쳤다. 17일 하오 10시 15분께 「시발」택시(부산영880호) 운전사 장용태씨가 광복파출소에 신고했을 때 백 순경 옆에는 수사계 형사 2명이 있었다.
그러나 신고를 받은 백 순경을 두 형사가 알세라 사환 주모 군만을 데리고 현장에 달려갔다. 그곳에서 범인과 만난 백 순경은 밀수품에만 전신경을 쏟았고 눈치챈 범인이 도주할 때도 구태여 최후까지 쫓지도 않았다. 백 순경은 돌아와 「박스」안을 뒤져본 후에 겨우 동표들의 지원을 요청했다. 그때 두 형사와 같이 달려갔으면 범인은 현장에서 잡혔을 공산이 크다. 당황한 백 순경과 주군은 시체를 끌어내고 「박스」안팎을 마구 뒤집어 중요한 증거물을 없애버린 셈.
앞으로 범인이 잡혀 깨끗한 자백을 받는다고 해도 공소유지가 안될만큼 증거보존이 안돼있다.
경찰은 범죄신고에서 수사개시까지 통례적인 관할 다툼을 벌여 18일 상오 2시께야 동대신파출소에 수사본부를 차렸고 피살자 신원은 18일 새벽 3시에야 드러났다. 현장보존을 소홀히 한 경찰은 이번엔 시간낭비까지 한 것이다.
이 사건만큼 범인목격자가 많은 사건도 드물다. 운전사·백 순경·주군 뿐이 아니라 18일 상오 0시50분쯤 근하군의 아버지 김용선씨가 집근방에서 정체 모를 검은 그림자를 보았고, 범인과 해변에서 대화한 낚시꾼이 있고, 범인으로 추정되는 「쫓기는 젊은이」와 어깨를 부딪친 사람 등 목격자는 많다. 이래서 경찰이 펼친 투망식 용의자 수사에서 2백50명을 대질시켰으나 기억력의 신빙성 문제가 심각하게 논의되고 있다.
이 대질에서 운전사 장씨가 꼭 짚어냈다는 동대신동 일대의 불량배 이실근(20·보수동1가) 군에 경찰은 무척 많은 용의점을 발견했다. 사건당일인 17일 하오 9시께부터 이군은 친구 4명과 함께 살해현장 부근에 있었고 그 날밤의 「알리바이」가 석연치 않으며 운전사 장시가 이군을 보더니 "소름이 끼친다"고 외면까지 하면서 "경찰은 귀신이다" 했다는 것이다. 또 25일에는 이군으로부터 자백(물론 자의에 의한 것이라고는 경찰간부도 믿질 않는다)가지 받았으나 자백을 뒷받침할 방증이 없고 아무리 조작된 「알리바이」라도 깨버릴만한 방증이 없어 경찰은 미련만 남기고 자신을 못갖는다. 그간 정보수사와 현장중심 수사에서 경찰이 잡아 대질한 2백50명의 용의자 가운데서 그래도 근사치라고 볼 수 있는 것이 이군 하나 뿐이며 나머지는 모두가 엉뚱한 인권유린에 그쳤고 가위 20세 청년의 수난시대를 이룬 셈.
25일에 이르러 경찰은 전식모 강모(19) 양에게서 근하군의 어머니 최을란(37) 씨의 「좋지못한 이야기」를 들었고 검찰은 술도 안먹고 행실도 좋았다는 근하군의 아버지 김용선씨의 아름답지 못한 증거물을 입수함으로써 김씨부부가 수사개시후 10일이 되도록 말문을 열지 않은 「숨은 이유」에 대한 실마리를 잡았다. 26일부터 검·경은 모두 근하군 가정의 들춰내기 싫은 부분에 대한 수사를 중점적으로 벌이기 시작했고 경찰은 이선을 「최후의 선」으로 보고 있다.
이밖에도 범인의 유류품인 「볼·박스」판매 「루트」는 희미하여 별진전이 없다. 검찰은 처음부터 사건을 원한관계살인에 잡았고 경찰은 원한-약취 유인-원한으로 방향을 바꿔가면서 갈팡질팡했다. 더우기 검찰과 경찰의 수사통일문제는 미묘하다. 경찰은 알맹이를 검찰에 숨기고 수족없는 검찰은 경찰을 불신하고 있다.
이것은 부산지검이 지난번 춘우군 사건에서 경찰을 앞질러 범인을 잡은 후의 특수사정이다. 뒤늦게 나마 검·경이 모두 원한관계에 발을 맞춘 이상 검찰의 수사지휘권이 확립되어 경찰이 그의 수족같이 움직여줄 때 사건은 「제로」지대에서 헤어날 수 있을 것 같다. [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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