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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극적인 소설에 푹 빠지는 건 옥시토신의 힘?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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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힘으로 테러도 예방할 수 있을까. 마음이론에 따르면 테러범이 좋은 소설을 많이 읽었을 경우 지난 4월의 미국 보스턴마라톤 폭탄테러 같은 처참한 일은 예방할 수 있다. [AP]

올해 초등 1·2학년과 중등 1학년 수학 교과서에 난해한 개념을 이야기로 풀어서 설명하는 스토리텔링(storytelling) 기법이 적용됨에 따라 학부모들이 달라진 수학 교육 방식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고대 신화에서 현대 소설까지 인류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또 즐기고 있다. 이러한 성향이 인간의 본성처럼 진화된 이유에 대해 미국 하버드대의 진화심리학자인 스티븐 핑커는 설득력 있는 설명을 내놓았다. 2007년 ‘철학과 문학(Philosophy and Literature)’ 4월호에 실린 논문에서 핑커는 “이야기가 집단에서 정보 획득과 대인 관계에 필요한 도구였기 때문에 인류의 진화 과정에서 이야기를 주고받는 성향이 존속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인류의 조상은 집단을 이루고 살면서 사회적 관계가 갈수록 복잡해짐에 따라 다른 구성원들이 누구이며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기 어려워졌다. 구성원에 관한 정보를 확산시키는 효과적인 방법의 하나로 이야기를 만들어 주고받게 되었다는 것이 핑커의 설명이다.

핑커의 주장대로 오늘날에도 보통 사람들의 대화는 대부분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진다. 1997년 영국 리버풀대의 진화심리학자인 로빈 던바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공공장소에서 대화하는 시간의 65%는 사람에 관련된 이야깃거리에 할애되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핑커나 던바의 주장처럼 이야기는 집단 내에서 사회적 결속을 촉진하고 집단의 지식을 다음 세대로 전승하는 유용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인간 문화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다.

문학평론가 김현(1942~90)은 그가 엮은 ?문학이란 무엇인가?(1976)에서 “문학은 인간 정신이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폭넓은 공간”이라고 전제하고 “문학 작품이 독자들에게 정서적 반응을 불러일으킨다면 그것은 어떠한 형태로 그에게 작용하게 될까?”라고 묻는다. 이런 문제에 정통한 심리학자들은 이야기가 사람의 마음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 연구 보고서를 잇따라 발표하고 있다.

소설 통해 사회적 기술 습득할 수 있어
대표적인 성과는 1999년 6월 캐나다 토론토대의 인지심리학자인 키스 오틀리가 ‘일반심리학 개관(Review of General Psychology)’에 발표한 논문이다. 오틀리는 ‘소설이란 사람 마음의 소프트웨어에서 동작하는 모의실험(simulation)’이라는 독특한 이론을 제시했다. 이야기는 사회생활을 위한 ‘비행 시뮬레이션 장치’라고 비유했다. 비행기 조종사들이 비행 모의실험을 통해 비행기술을 습득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소설을 읽으면서 사회적 기술을 학습할 수 있다는 뜻이다. 오틀리의 사회적 시뮬레이션 이론은 소설을 많이 읽는 책벌레들이 소설을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한다는 사회적 통념과 정면으로 배치될 수밖에 없다. 시뮬레이션 이론에는 책만 붙들고 있는 고립된 행동이 결과적으로는 사람과 더불어 사는 기술을 터득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틀리의 제자인 레이먼드 마는 스승의 이론이 현실 세계에서 적용 가능한지 확인하는 실험을 했다. 소설을 읽는 습관과 사회적 기술의 상관관계를 분석하는 실험을 한 결과 시뮬레이션 이론이 타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2006년 발표된 이 논문은 소설을 읽는 행동과 사회적 기술 사이에 강력한 관계가 있음을 처음으로 입증한 연구 성과로 평가된다.

사회적 기술이 뛰어난 사람일수록 잘 개발된 마음이론(theory of mind)을 갖고 있게 마련이다. 때때로 독심술(mind reading)이라 불리는 마음이론은 타인의 입장이 되어 그 사람이 자신과 다른 생각이나 의지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마음이론은 네 살 무렵부터 갖게 되어 평생 동안 지속적으로 향상되는 능력이다. 2006년 레이먼드 마의 논문은 소설을 많이 읽을수록 마음이론이 뛰어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2009년 오틀리는 소설을 읽는 행위가 성격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했다. 심리학에서는 사람의 성격이 다섯 가지 측면으로 구분된다고 본다. 성격에 차이를 부여하는 5대 특성은 지적 개방성(openness to experience), 성실성(conscientiousness), 외향성(extroversion), 친화성(agreeableness), 정서 안정성(neuroticism)이다. 영어 첫 글자를 따서 ‘OCEAN’이라 불린다. 다시 말해 성격은 ▶새로운 생각에 개방적인가 무관심한가 ▶원칙을 준수하는가 제멋대로인가 ▶사교적인가 내성적인가 ▶우호적인가 적대적인가 ▶신경이 과민한가 안정적인가 하는 기준 사이에서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다.

오틀리는 실험 참가자 166명에게 러시아 작가인 안톤 체호프(1860~1904)가 1899년 발표한 단편소설 ‘개를 데리고 있는 여인(The Lady with the Dog)’을 읽게 했다. 이 소설은 작은 개와 함께 해변을 거니는 유부녀가 우연히 만난 러시아 은행가와 벌이는 간통 이야기이다. 실험 참가자들이 이 소설을 읽기 전과 읽은 후의 5대 특성을 비교한 결과, 성격에 큰 변화가 일어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를테면 체호프의 이야기가 독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하고 느끼게 함으로써 성격에 변화를 일으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오틀리는 5대 특성과 함께 사회적 연결 및 고립의 정도를 측정한 결과 소설을 많이 읽는 사람일수록 마음이론, 곧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이 재확인되었다. 물론 소설을 엄청나게 탐독하는 사람도 결코 고립된 성격의 외톨이가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이야기 구조(내러티브)가 뛰어난 소설은 독자를 사로잡아 작품의 주인공과 정서적으로 일체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이러한 상태는 심리학에서 ‘이야기 도취(narrative transport)’라고 불린다. 말하자면 이야기 도취는 소설 주인공과 독자 사이에 감정이입(empathy)이 발생할 때 나타나는 심리적 현상이다.

소설은 삶을 연습하는 훌륭한 운동장
이런 맥락에서 2011년 격월간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마인드’ 11·12월호에 기고한 글에서 오틀리는 “이야기는 특히 청소년의 대인 관계 기술 형성에 유용하므로 소설을 많이 읽힐 필요가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소설은 삶을 연습하는 훌륭한 운동장인 셈이므로 혹시 자녀가 책만 붙들고 있더라도 전혀 걱정할 일은 아니라는 뜻이다.

한편 이야기가 사람의 뇌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 논문도 발표되고 있다. 미국 워싱턴대의 심리학자인 제프리 잭스는 소설을 읽을 때 사람의 뇌에서 어떤 반응이 나타나는지 파악하기 위해 기능성 자기공명영상(fMRI) 장치로 뇌를 들여다보았다. 2009년 ‘심리과학(Psychological Science)’에 실린 논문에서 일상생활의 상황에서 활성화된 뇌 영역이 소설 주인공이 그런 상황에 처할 때도 똑같이 반응한다고 보고했다. 다시 말해 사람의 뇌는 사실과 허구의 차이를 분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미국 클레어몬트대의 신경과학자인 폴 자크는 소설 주인공의 상황을 자신의 것처럼 받아들이는 감정이입이 일어나는 까닭은 옥시토신(oxytocin)이 분비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뇌에서 합성되는 옥시토신은 성생활이나 대인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호르몬이다. 감정을 자극하는 이야기일수록 옥시토신이 많이 분비되어 소설 주인공의 이야기를 마치 자신의 것인양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미국 버지니아 공대의 신경과학자인 리드 몬태규는 사람이 이야기를 들을 때 뇌의 보상체계에서 일어나는 반응을 연구했다. 포유류의 뇌에는 음식, 섹스, 자식 양육처럼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행동을 정상적으로 해나갈 수 있도록 쾌락을 보상으로 제공하는 신경세포 집단이 있다. 보상체계는 중독에도 관련된다. 어떤 이야기에 중독되는 것도 보상체계가 활성화되기 때문이다. 중독성이 강한 이야기를 들으면 소량의 코카인을 복용할 때와 다를 바 없는 효과가 나타나는 것으로 밝혀졌다.

미국 프린스턴대의 유리 해슨은 같은 영화를 보는 사람들의 뇌에서 같은 반응이 나타나는 것을 확인했다. 2010년 ‘미국립과학원 회보(PNAS)’ 8월 10일자에 실린 논문에서 이야기를 듣는 사람의 뇌 활동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의 뇌 활동과 같아졌다고 보고했다. 이 연구 결과는 내러티브(이야기 구조)가 집단 구성원을 하나로 묶어 동일한 정체성을 갖도록 하는 사회적 접착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인류의 생존에 보탬이 되었다는 진화심리학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과학적 근거의 하나로 받아들여진다.

집단을 하나로 묶는 이야기의 힘
이야기가 사람의 뇌에 영향을 미치는 메커니즘이 밝혀짐에 따라 이를 영화 제작, 집단의 도덕성 제고, 테러 방지 등에 활용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오고 있다. 2011년 영국 주간 ‘뉴 사이언티스트’ 2월 12일자에 따르면 유리 해슨은 관객의 뇌가 내러티브에 반응하는 메커니즘을 영화 제작에 활용하려는 움직임을 신경영화예술(neurocinematics)이라 명명하고 미래의 영화감독은 관객의 뇌 반응에 따라 이야기를 구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내러티브가 종교 단체나 군대 같은 집단을 동일한 정체성으로 묶는 힘이 있기 때문에 가령 육군사관학교에서 올바른 이야기를 강의 내용에 많이 포함시키면 도덕적 용기를 기꺼이 발휘하는 장교를 길러내는 데 보탬이 될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내러티브와 관련된 뇌 연구 결과를 활용해 사람들이 남을 해치고 싶은 욕구를 느끼도록 자극하는 이야기에 심취하지 않게끔 하는 방안을 찾아낼 수만 있다면 “자살 폭탄 테러 같은 범죄도 사전에 방지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심리학자도 있다.

'천일야화'의 주인공인 셰에라자드는 1000일하고도 하루 동안이나 밤을 새워 이야기를 풀어내서 결국 목숨을 연명하는 데 성공하고 왕은 마음이 누그러져서 사람 죽이는 일을 멈춘다. 이처럼 사람의 목숨도 구할 정도로 괴력을 지닌 이야기의 힘을 빌려 어린 학생들이 어려운 수학 공부를 재미있게 하고 있다면 스토리텔링 기법을 다른 과목에도 활용해 보면 어떨는지.



이인식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국가과학기술자문위원, KAIST 겸직교수를 지냈다. 신문에 490편, 잡지에 160편 이상의 칼럼을 연재했다. 『지식의 대융합』 『이인식의 멋진 과학』 『자연은 위대한 스승이다』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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