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도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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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로마시대 로마인들은 다양한 축제를 즐겼다. 1세기 중반엔 축제일이 연간 1백59일이 될 정도로 많았다. 이러한 로마의 축제와 활력은 정치.경제적 안정과 풍요에 따른 것이었으며 그 기초는 아우구스투스가 닦았다.

아우구스투스의 통치 후 로마는 약 2백년간 미증유의 평화(팍스 로마나)를 누렸다. 당시 로마는 각 식민지에 도시를 건설한 후 군대를 주둔시켰고 주요 도시를 총길이 8만5천㎞, 두께 2m의 견고한 도로로 연결했다.

로마는 이러한 인프라를 활용해 로마식 생활양식과 화폐.도량형 등 로마식 표준을 식민지에 보급했다. 일부 식민지는 로마식 표준화에 대해 반발했지만 로마는 자신들과의 상거래의 모든 기준을 로마식으로 관철해 로마와 거래한 인도.중국.아라비아 상인들도 이를 따랐다.

평화가 지속되자 로마인의 생활은 사치와 향락으로 빠졌다. 또 대부분의 식량을 속주로부터 공급받는 바람에 핵심 자원의 해외의존성이 높아졌고 이의 안정을 담보하기 위해 속주에 대한 통치도 점점 가혹해져 갔다.

여기에다 오늘날의 3D 업종에 종사할 노동자들을 속주로부터 징발해오는 바람에 점점 노예의 비중이 늘어났다. 그 결과 기원전 1백년, 로마시의 인구는 1백20만명이었는데 노예가 40만명이나 됐다.

로마의 이러한 구조적인 위기에 대한 내부 비판도 없지는 않았다. 아시아주의 콘술(집정관)을 지냈던 타키투스는 "로마인은 폐허를 만들고 그것을 평화라고 불렀다"며 현상을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속주에 도시를 건설해 지배의 효율성을 확보하는 로마식 통치법은 로마의 몰락 후에도 계속됐다. 각국의 통치자들은 정치와 상업기능을 가진 중심도시를 건설했고 도시는 사람.자원.돈을 흡인하는 데 대단한 효용성을 입증했다. 반면에 농촌과 지방은 피폐해갔다.

오늘날에도 도시의 흡인력은 줄지 않아 한번 형성된 도시는 주변으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1백년 전 세계 최대 도시는 인구 4백50만명의 런던.뉴욕(3백40만).파리(2백50만)순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인구 1천만명 이상의 도시가 10개도 넘는다.

현재 도시거주 인구는 세계인구의 약 48%인 29억명이다. 아시아가 이 중 절반을 차지하며 급속한 산업화를 겪은 우리는 비중이 더욱 크다. 그런데도 우리는 남보다 더 빨리, 더 많이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려 한다. 발상의 전환은 불가능한가.

김석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