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살아있는 국보' 물이 닿지 않게 살릴 방법 없나 …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3면

암각화 연구자인 한국화가 김호석씨가 서울 세종로 국립고궁박물관에서 40년 만에 일반 공개된 울산 반구대 암각화 1973년 탁본에 드러난 형식적 특성과 숨은 뜻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 황평우]

한 폭의 장엄한 풍경화다. 신성한 공간에 펼쳐진 제단화(祭壇畵)다. 수천 년 시공을 뛰어넘은 바람과 파도소리가 우렁우렁 울려 퍼지는 듯 온몸이 서늘해진다.

 21일 오후 서울 세종로 국립고궁박물관(관장 정종수) 2층 기획전시실. 들어서는 관람객마다 3층 기단 위에 펼쳐지는 가로 10m, 세로 3m 대형 그림 한 점에 사로잡혀 눈을 떼지 못한다. 40년 만에 처음 공개되는 국보 제285호 울주 반구대암각화의 탁본은 굽이굽이 사연을 품고 사람들 가슴을 파고든다.

 5000년 전 이 땅에 정착해 사냥하고 고기잡이 하며 살았던 우리 조상들의 일상이 한 편의 비디오 영상 같다. 고래가 뛰놀고 호랑이와 사슴이 어우러진 선사시대의 삶과 세계관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하다. 이 살아있는 유적이 물에 잠겨 죽어가고 있다.

 ‘그림으로 쓴 역사책-국보 반구대 암각화, 물속에 잠깁니다’는 희귀한 이 바위 국보의 숨은 가치와 슬픈 운명을 알리는 기획특별전이다. 1971년 12월 그 존재가 처음 보고된 뒤 하루가 다르게 훼손되고 있는 반구대 암각화(본지 4월 12일자 25면)의 생명을 구하려는 연구자들이 여러 해 준비한 흔적이 역력하다.

 우선 첫 보고자인 문명대(72) 당시 동국대 불교미술학과 교수팀의 발굴 사진 자료가 나왔다. 바위그림이 있다는 주민들 제보에 1년 여 언저리를 탐색한 발자취다. 문 교수는 “반구대 암각화는 그 자체로 역사와 사상과 예술을 품은 살아있는 국보”라고 말한다.

 둘째는 암각화의 상태가 비교적 좋았던 1973년 임세권(65) 안동대 교수가 물이 완전히 빠진 상태에서 제작한 탁본 공개다. 인근 사연댐 수위 탓에 1년에 8개월을 물속에 잠겨 표면이 갈라지고 마모되기 전 아름다운 벽화를 볼 수 있다.

 임 교수는 “사람으로 치면 해마다 물고문을 받고 있는 셈이니 그 고역을 이제 끝내줘야 국보 대접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한다.

 셋째는 반구대 암각화를 연구한 한국화가 김호석(56)씨가 해석한 이 그림의 의미다. 외떨어진 물가에 위치한 신성함과 연대기적 정보, 선사시대 공동체의 생활양식을 담고 있다는 전세계 암각화의 공통점 외에 독자적 요소가 많다는 것이다.

 하나의 대형 암벽에 그려진 점, 사냥한 동물의 영혼을 달래 원한을 안 입으려 북쪽으로 그린 점, 수렵은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농경은 도식화해 추상화한 점, 호랑이 다리를 묶거나 사슴 목에 올가미를 씌워 이미 정착시기에 들어섰음을 표현한 점, 그림 전체가 철저한 계산으로 조화와 긴장감을 유지한 점 등이 탁월하다고 평했다.

 김씨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올라 있는 만큼 정식 등재를 위해선 그 탁월한 가치를 우리 스스로 아끼고 보존하며 지켜갈 일이 시급하다”고 호소했다.

 울산암각화박물관(관장 이상목)은 19일 반구대 암각화에서 숨은 그림 11점을 추가로 발견했다고 발표해 이번 전시에 뜻을 더했다.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도록』을 발간하기 위해 유적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확인된 그림 가운데 고래 1점, 육지동물 3점, 인물상 2점 등 6점은 형상이 뚜렷하다. 이로써 반구대 암각화에 새겨진 그림은 2000년 울산대학교 박물관 조사 때 296점에서 307점으로 늘어났다.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최근 울산시에서 열린 ‘2013년 주민자치위원 워크숍’에 참석해 “반구대를 살리기 위한 최선책은 암각화에 물이 닿지 않게 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이 상태로 간다면) 반구대 암각화가 201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기 전에 사라져버릴 것“이라고 말해 주변을 숙연하게 했다. 전시는 5월 19일까지. 02-3701-7500.

정재숙 문화전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