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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일」벗는 철기문화|동양의 첫 유적‥‥동래「제련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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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국립박물관 선사유적 발굴대는 6월 하순의 2주일 동안 부산시 동래역 뒤 작은 언덕을 뒤덮은 조개껍질 더미를 걷어내던 중 삼한시대의 제련소 유적을 발견했다.
장마 때문에 부진한 작업을 중단하려던 지난 30일, 한 귀퉁이에서 뜻밖에 불에 탄 붉은 흙 웅덩이를 찾아내고 그것이 쇠를 녹이던 도가니임을 확인한 관계자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도가니의 유구는 길이 약 2미터, 폭이 1미터. 찰흙(점토)을 빚어 깊숙한 솥을 만들고 불땜으로써 그 일대의 흙까지 붉게 타 굳어있다. 다만 유구가 언덕의 위쪽에 위치, 지표 가까이(50센티) 있어서 도가니의 높이는 알 수 없게 허물어져 있다(서구의 예는 1미터).
발굴대는 이 유구가 유물층을 가로지른 쇳물층과 연관된-즉 초기 철기 시대의 단철 제련장임을 추정, 환성을 올렸다.
동양에서 이 같은 유적의 발견은 이번이 처음이다.
사람이 무쇠를 뽑아내 기구를 만들기 시작한 가장 원시적 수법인 단철은 점토로 만든 도가니 속에 환원하기 쉬운 사철과 숯을 층층이 넣고 가열함으로써 쇳덩이(해면철)을 얻었고 그것을 두드려 기구를 만들었다고 발굴책임자 윤병무 학예관은 말했다.
이 때 가열도는 7백∼1천도. 이런 낮은 열로 쇠를 가려냈기 때문에 불순물을 포함하는 주철(훨씬 고열로 얻어져 삼국시대 후기부터 사용)은 녹아 흘러버렸다. 방대한 넓이의 패총 중 이번 파헤친 1백여 평방미터에는 몇 겹의 쇳물층이 전면에 깔려 있어 여기서 제련된 단철이 『굉장히 많은 양』임을 넉넉히 짐작케 하고 있다. 이 지역은 원래 진한의 영토로서 진한은 당시 동방에서 유명한 철산지였음이 역사기록에 밝혀 있다. 위지동이전은 위인과 동예인이 모두 와서 무역해가고 모든 매매에 쇠를 돈처럼 사용했으며 낙랑과 대방서도 여기서 철을 공급해다 썼다고 한다.
또한 이조 때도 경남일대가 철의 세공지였으므로 삼한이래 지목된 철산지였음을 알 수 있다.
원래 해안에 접해 있었을 동래는 수10만평에 달하는 패총과 성지 등이 선사시대에 커다란 부족이 군거했음을 입증한다고 윤 학예관은 말했다.
패총의 최하층은 김해토기층, 그 위가 바로 쇳물층.
즉 김해토기가 기원 전후한 것인 것만큼 이곳 제련장의 전성기는 거의 2천년 전임을 헤아리게 된다. 그 위에 재가 많이 섞인 회색 점토가 쌓였고 다시 위에 붉은 소토와 숯이 박혀 한층을 이루었는데 이는 제련장의 폐쇄시기를 어렴풋이 설명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번 발굴에서 녹슨 쇠덩이 이외에 이렇다할 철기는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당시 사용하던 발화석이 출토됐고 노지 주변에서 기둥 구멍이 3개소나 드러나 그 일대를 확대 발굴하면 주거지 등 선사 유적이 더 드러날 가능성이 짙다고 관계자들은 내다보고 있다.
국립박물관은 앞으로 동래 패총에 대한 2차, 3차의 발굴 및 양산·창원 등 경남 해안지대의 패총 조사를 통하여 동방에서 떨친 진한의 철기문화를 밝혀낼 계획이다. <이종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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