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남윤호의 시시각각

‘철의 여인’을 보내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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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남윤호
논설위원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의 사망을 축하하며 샴페인을 병째로 들이켜는 여인, 마귀할멈 같은 대처의 인형을 들고 환호하는 군중…. 지난 주말 런던의 반(反)대처리즘 시위를 전하는 외신 사진들이다. 대처가 뭘 했길래 그의 죽음 앞에서도 미움을 끊지 못하나.

 그는 강성 노조를 제압하며 세금 축내는 공기업을 민영화했다. 또 작은 정부를 표방하며 규제를 확 풀었다. 경제가 고질적인 영국병에서 벗어난 것도 그 덕분 아니었나. 반면에 복지 축소, 양극화, 노조 탄압으로 비난도 받았다. 대처를 향한 증오는 결국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발이다. 대처의 죽음 앞에서 신자유주의의 수혜자는 추도를, 피해자는 축하를 하는 모습이다.

 그런 대처의 선택을 옳고 그름의 잣대로 평가할 수 있는가. 시장경제 위주의 정책에 우선순위를 둔 게 죽어서도 욕 먹어야 할 악행이었나. 어느 지도자든 국민의 구미를 다 맞춰줄 수는 없다. 나라 살림도 야무지게 꾸리고, 일자리도 넘치게 만들고, 소득도 넉넉히 안겨줄 수 있다면야 그게 지상낙원 아니겠나. 그런데 현실은 이와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학계에선 재정·고용·소득이라는 세 가지 정책목표의 동시 달성은 불가능하다고 판정한 지 오래다. 하버드대 경제학자 토번 아이버슨과 앤 렌은 1998년 ‘평등, 고용, 그리고 예산 제약’이라는 논문에서 재정 건전성, 소득 평등, 고용 증대를 트릴레마(trilemma)로 규정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를 딜레마라 하는데, 트릴레마는 그런 난제가 셋이나 겹친다. 생산성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리기 어려운 서비스 경제의 구조적 특성 탓이라고 한다. 아이버슨과 렌은 잘하면 셋 중 둘까지는 동시에 달성할 수 있다고 봤다. 하지만 세 가지를 다 잡는 것은 불가능하며, 전례도 없다고 했다.

 대처는 셋 가운데 재정 건전성과 고용 증대를 택한 셈이다. 그 부산물이 소득격차에 따른 양극화다. 신자유주의를 좇은 나라들의 공통 현상이다. 그런 나라에선 복지를 개인의 자활 의지에 떠넘기곤 한다. ‘일자리가 최상의 복지’라는 말이 나온 것도 그 같은 맥락이다. 복지 사각지대가 커지고, 그로 인한 사회 불만이 퍼진 건 당연한 결과다. 뒤늦게 복지, 복지 하며 여야 모두 호들갑인 우리 또한 그렇지 않나.

 이와 달리 재정 건전성과 소득 평준화를 추구한 나라도 있다. 독일·네덜란드 등 상당수 유럽 국가가 그렇다. 버스 기사도, 목수도 웬만큼 벌며 중산층으로 살 수 있다 해서 우리도 부러워하지 않았나. 문제는 일자리가 확확 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회적 합의에 의한 일자리 나누기로 실업에 대처한다지만 좀 옹색해 보인다.

 북유럽 복지국가들처럼 소득 평등과 고용 증대에 집중해 성공한 곳도 있다. 복지론자들에겐 교과서다. 민간이 만들지 못한 일자리를 정부가 나서서 해결해 준다. 복지 시스템도 정교하다. 대신 무거운 세금을 견뎌야 한다. 재정 건전성도 위태로워진다.

 이런 정책 조합은 어디까지나 선택의 문제다. 윤리적으로 뭐가 낫다고 할 수는 없다. 물론 요즘 같은 시절 신자유주의를 편들면 꼴통으로 욕먹기 십상이다. 그렇다고 덮어놓고 평등과 복지를 외치는 건 깡통이나 할 짓이다. 국민의 합의에 따르자는 주장 역시 애매하고 무책임하다. 매번 국민투표라도 하자는 건가. 각자 합리성을 지닌 선의의 정책목표 가운데 무엇을 취하고 버리느냐는 처음부터 지도자의 결단에 따르는 게 나을 수 있다. ‘철의 여인’은 그런 인식 위에서 강철의 결정을 했다.

 이에 비해 박근혜 대통령은 트릴레마를 동시에 잡으려는 듯하다. 성공하면 세계사에 길이 남을 일이다. 하지만 조만간 하나 또는 둘을 미루거나 포기해야 할지 모른다. 일일이 국민적 합의를 구할 겨를은 없을 테니 고뇌에 찬 결단을 슬슬 준비해 두는 게 좋다.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하는 배짱은 그럴 때 필요하다. 대처의 영혼도 지금 그렇게 말하는 듯하지 않나.

남윤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