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빚 탕감 땐 내 돈 갚아라” 사채업자 기승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1면

4일 서울 구로구 오류시장에서 30년째 떡집을 운영 중인 김영동(60)씨가 하나은행 희망금융플라자 직원과 금융 상담을 하고 있다. 오류시장은 2005년 재개발에 실패해 현재 30여 개 점포만이 남아 있다. [사진 하나금융지주]

# 지난 4일 서울 구로동 오류시장. 재개발 실패로 상권이 쇠락한 이곳에는 30여 개의 상점이 남아 근근이 장사를 하고 있다. 상인 김정순(70·가명) 할머니는 “2년 전 인상 좋은 젊은이가 급전을 꿔준다기에 대출 1000만원을 받았더니 이자가 너무 높아 감당을 못하고 있다”며 “국민행복기금에 전화해 봤더니 이건 사채라서 탕감이나 저금리 대출 전환이 아예 안 된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지난 2월부터 전통시장을 돌며 서민금융 상담을 돕고 있는 하나은행 희망금융플라자의 허은숙 상담사는 “적잖은 상인들이 행복기금으로 감면이 안되는 고금리 사채를 안고 있다”며 “미소금융과 같은 서민금융 프로그램을 통해 저금리 대출을 받아 사채를 줄이는 방법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 3년 전 사업에 실패해 신용불량자가 된 양모(49)씨는 행복기금 신청을 망설이고 있다. 사채업자들이 벌써부터 양씨에게 ‘행복기금에서 빚 탕감을 받아 형편이 나아지면 내 돈 먼저 갚으라’고 엄포를 놓고 있어서다. 채무 7000만원 중 4000만원이 사채업자와 영세 대부업체에서 빌린 돈이다. 양씨는 “행복기금 지원을 신청해도 고금리 사채가 있는 한 신용불량 신세를 면하긴 어려울 것 같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국민행복기금의 채무 탕감으로 사채업자의 주머니가 두둑해진다면? 22일 행복기금의 채무조정 예비접수를 앞두고 있어서는 안 될 이런 일이 현실화될 수 있다는 지적이 잦아지고 있다. 사채를 낀 채무자의 빚을 행복기금이 탕감해주면 채무자가 신용회복을 하기도 전에 사채업자들이 채권 추심을 하고, 채무자는 또다시 부채의 늪에 빠지는 악순환이 반복될 거라는 우려다.

 9일 금융위원회와 국민행복기금 사무국에 따르면 총 5000여 개의 대부업체 중 대형 대부업체 131개를 뺀 4800여 개가 행복기금과 채무재조정 협약을 맺지 않았다. 불법 영업을 하는 사채 규모는 파악조차 되지 않고 있다. 영세 대부업체 채무와 사채에 대한 보완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행복기금의 효과가 크게 반감될 수밖에 없다. 파산 전문가들은 행복기금 지원 대상인 ‘6개월 이상 채무자’ 중 상당수가 고금리 대부업체 대출이나 사채를 끼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김관기 변호사는 “보통 제도권 금융회사 빚을 갚기 위해 사채를 빌렸다가 신용불량자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실제 경기도 수원의 한 개인파산 전문 변호사 사무실에는 행복기금에 관해 문의하는 상담자가 하루 평균 60여 명으로 지난달보다 3배가량 늘었다. 하지만 이 사무실의 황희석 사무장은 “조정 대상에서 제외된 채무가 있는 이들이 많아서 실제 채무조정을 받을 수 있는 비율은 5%밖에 안 될 것”이라고 전했다.

 전통시장 상인들은 행복기금 지원을 받지 못할 가능성이 더 크다. 암암리에 일수대출을 쓰는 경우가 많아서다. 오류시장에서 만난 상인 최모(71)씨는 “한순간도 자리를 비울 수 없기 때문에 급하게 돈이 필요하면 일수를 쓸 수밖에 없다”며 “은행 빚보다 사채가 많아 행복기금으로 채무를 조정받는 건 남의 일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협약에 가입하지 않은 영세 대부업체에 빚을 진 사람도 적지 않다. 류재명 국민행복기금 사무국장은 “행복기금에서 직접 대부업체와 연락해 채권 매입을 시도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협약 가입은 강제성이 없다. 대부업체가 채권을 안 팔겠다고 하면 더 이상 방법이 없다. 한 은행의 여신담당 임원은 “대부업체 입장에서는 행복기금을 지원받은 채무자로부터 원리금을 그대로 회수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에 헐값에 채권을 넘길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사채는 더 풀기 어렵다. 정부는 “불법 사채는 채무조정이 아닌 단속의 대상”이라는 입장이다. 신용불량자들도 사채가 있다는 사실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정부가 단속에 들어갈 경우 사채업자가 보복할 것을 두려워하는 이들이 많다.

 대안으론 행복기금을 법원의 개인파산·개인회생 제도와 연계하는 것이 제시된다. 개인파산이나 회생 판결을 받으면 채무자는 채무조정협약과 상관없이 채무를 조정받을 수 있다. 행복기금에서는 신청자가 불법 사채 단속을 요청하더라도 사채업자가 개인 간의 합법적인 채무라고 주장할 경우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법원에서 판결이 나면 합법·불법에 관계없이 모든 채무가 면책되는 장점이 있다.

이태경·홍상지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