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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중엽∼말엽 인물중심>(51) 서재필(하) - 류홍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독립문 등 세워>
그는 여기에 만족치 않고 이완용 이상재 윤치호 등 30여명의 인사들을 규합하여 독립협회를 만들어 스스로 고문이 되었다. 또한 중국사신을 맞아들이던 영은문과 막화관 자리에는 독립문과 독립관을 세웠다. 이러한 일련의 운동은 조국의 자주독립과 민족의 자립정신을 고취시킴으로써 외세의 간섭없이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나라를 발전시켜 보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세계 열강에 속속 이권을 내어주고 있는 당시 정부에 대한 독립협회의 공격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혹은 신문을 통하여 혹은 시민대회의 연설을 통하여 정부의 시책을 통렬히 비판하였다. 그들은 다른 나라와 동등한 자주적인 독립국가를 세울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그 결과, 노국공사관의 보호를 받고 있던 고종은 독립협회의 요구사항을 수락하고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에 돌아와 황제위에 올랐다. 국호는 대한제국이라 하고 연호는 광무로 정하여 이를 만국에 공포하였다. 노국의 군사교관과 재경고문 「알렉세프」도 소환되고 한노은행도 폐지되었다,
독립협회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일반국민들도 정치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연일 시민집회를 열어 정부를 공격하였다. 1898년에는 종로광장에서 대규모의 민권 운동이 있었다. 관민공동회가 그것이다. 시민의 열렬한 찬동으로 채택된 결의문은 고종에게 주청되어 실시할 약속을 받았다.

<미국으로 추방>
그 내용은 자주적인 입장을 굳게 하고 외국에 의탁하지 말 것, 외국인에게 함부로 이권을 주지 말 것, 재정은 도지부에서 일관하고 예산결산을 인민에게 공개할 것, 중추원 직제를 개정하여 의관의 반은 민선으로 할 것 등이었다.
정부와 독립협회의 대립은 갈수록 날카로웠다. 정부는 독립협회를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먼저 노·일 양국과 협력하여 l898년 4월에 서재필을 미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독립협회의 활동이 모두 그의 배후조정에 의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돌아간 후에도 독립협회의 활동은 젊은 강경파 회원들의 주동으로 더욱 확대되어갔다.
정부는 급기야 홍종우 이유인 등과 길영수의 보부상을 모아 황국협회라는 어용단체를 만들어 이에 대항하였다. 두 협회는 여러 차례 폭력으로 대결하여 희생자가 속출하였다. 고종은 그해 12월에 양 협회의 해산을 명하고 만민공동회를 주도한 윤치호 이상재 이승만 등 18명의 독립협회 간부들을 투옥시켰다.
미국으로 쫓겨간 서재필은 1907년부터 문방구점을 경영하였다. 3·1 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2백여명의 교포를 모아 한국독립원조회를 조직하고 상해 임시정부와 제휴하였다.

<국제연맹 가입 추진>
한편 「토머스」상원의원을 통하여 한국의 국제연맹가입을 촉구하고(1920) 「워싱턴」에서 열린 9개국 군축회의에 국내단체 3백70개의 이름으로 연판장을 제출하여 「휴즈」 국무장관을 움직였다. (「휴즈」장관은 일본에 권고하여 문화정책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또한 1925년에는 임시정부 대표 안창호와 함께 「호놀룰루」에서 열린 범태평양회의에 참석하여 일본의 비인도적인 정책을 규탄하였다. 그는 「펜실베이니어」대학의 교편을 잡고, 여러 병원으로 전전하면서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독립운동에 사재를 털어 넣어 문방구점은 불가불 문을 닫지 않으면 안되었다.
해방이 되자 그는 「하지」중장의 권유로 1947년 7월에 귀국하여 미군정 고문, 남조선과도정부 최고 정무관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뜻을 얻지 못하고 이듬해 미국으로 돌아가 1951년에 서거하였다. 향년 68세. <필자=문박·대구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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