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 읽기 ┃ 뇌과학] 뇌의 바탕인 무의식, 인류진화 에너지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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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과학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인류의 진화적 유산을 탐구하고 장애물을 극복하려는 시도다. 최근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인간 뇌지도 연구 프로젝트를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뇌과학의 최신 동향을 짚어보는 신간 두 종을 골랐다. 

새로운 무의식: 정신분석에서 뇌과학으로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
지음, 김명남 옮김
까치, 335쪽, 2만원

슬픈 기억만 골라 모두 지워버린다면 우리는 행복해질까.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는 실연으로 고통받는 조엘(짐 캐리)이 옛사랑의 기억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억을 삭제하는 회사’를 찾아가는 장면이 있다. 이미 옛 연인은 이 회사의 서비스를 받아 그를 완전히 잊고 새로운 사랑에 빠졌다.

 ‘나도 그녀처럼 이 고통스런 사랑의 기억에서 자유로워지리라’ 결심한 조엘은 연인와 관련된 모든 기억을 지우는 데 성공했지만, 결코 지울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바로 그녀와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자기자신의 ‘본래 그러함’이었다. 그것은 단지 성격이나 취향이 아니라, 나를 진정 나답게 만드는 그 무엇이다.

 심리학자 칼 융이라면 그것을 무의식의 그림자(shadow)라 부를 것이다. 우리가 감추고 싶어하는 자신의 부끄러운 측면, 그러나 가장 나다운 그 무언가를 구성하는 소중한 일부분으로서의 그림자. 그것은 의식의 힘으로 통제할 수 없다. 서로를 향한 지긋지긋한 기억뿐 아니라 이름과 얼굴까지 모두 잊은 두 사람은, 시간이 흘러 우연히 다시 만나자 또다시 첫사랑을 시작하듯 설레게 된다. ‘의식’은 그녀를 완전히 잊었으나, ‘무의식’은 그녀를 결코 잊지 못했던 것이다.

 『새로운 무의식』은 바로 이 통제 불가능한 무의식의 존재를 과학적으로 탐구한다. fMRI(기능적 자기공명영상) 등의 첨단기술을 통해 뇌에서 벌어지는 일을 직접 볼 수 있게 된 지금, 과학자들은 의식과 무의식의 메커니즘을 프로이트 시대보다 훨씬 합리적인 방법으로 연구하게 됐다. 현대의 뇌과학자들은 각종 실험과 데이터를 이용해 무의식의 존재를 규명해낸다.

 이 책의 흥미로운 결론은 우리의 두뇌가 상상 이상으로 ‘과학자의 길’보다 ‘변호사의 길’을 닮았다는 것이다. 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는 진실에 이르는 두 가지 길로 과학자의 길과 변호사의 길을 제시했다. 증거를 모아 이론을 구축하고 실험하는 과학자와 달리, 변호사는 거꾸로 ‘설득하고 싶은 결론’을 먼저 정해놓고 유리한 증거는 과장하고 불리한 증거는 깎아 내린다.

 인간의 마음에는 과학자와 변호사 모두가 있지만, 둘은 사이 좋게 협업하기보다 걸핏하면 충돌한다. ‘변호사를 닮은 무의식’이 만들어낸 피카소풍의 왜곡된 그림을, ‘의식이라는 합리적인 과학자’가 찬미하며 그 왜곡된 그림을 ‘사진처럼 정확하다고 믿는’ 쪽으로 진화해왔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뇌는 괜찮은 과학자이지만 훨씬 더 뛰어난 변호사였다.”

 그렇다면 우리의 무의식은 왜 이토록 비합리적인 방식으로 의식에게 각종 ‘피카소풍의 왜곡된 풍경’을 전송해주는 것일까. 저자는 명쾌하게 답한다. 비록 불합리하게 보일지라도, 그러한 ‘변호사형 무의식’은 인류의 진화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고. 의식의 측면에서 보면 인생은 이해할 수 없는 불합리와 감당할 수 없는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아무리 힘들어도 언젠가는 이 일을 해낼 것이다’라는 믿음은 무의식의 지지 없이는 불가능하다. 무의식은 ‘동기화된 추리’를 통해 우리의 미래를 이미 결정하고 끊임없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의식이라는 파트너에게 ‘넌 할 수 있다’고 부추긴다. 인류의 역사에서 기념비적 발견이나 위대한 예술적 성취는 무의식의 열렬한 변호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새로운 무의식』의 전제는 과학이라는 이름의 우주선으로 무의식이라는 우주를 탐험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무의식을 인간에게 유리한 쪽으로 길들일 수 있다는 믿음이기도 하다.

 나는 무의식을 의식의 힘으로 길들이기보다 오히려 무의식의 도움에 의지하는 편이다. 며칠 밤을 새워도 글이 풀리지 않을 때는 차라리 잠을 청한다. 모든 시름을 잊고 푹 자고 나면, 신기하게도 놀라운 속도로 글이 풀리기 시작한다. 내 의식이 자고 있는 동안, 내 무의식이 풀리지 않는 사유의 매듭을 풀어준 것이다.

 인간관계에서도 나는 무의식의 힘을 믿는다. 내가 조카를 껴안고 동화책을 읽어 줄 때, 조카가 이 동화의 문장 하나하나를 기억하지는 못해도, 이 순간에 ‘우리’만이 공유하던 신비로운 따스함을 이 조그만 아기의 무의식이 기억해주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는 무의식을 찰흙처럼 주무를 수는 없다. 하지만 날마다 우리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의 빛나는 영감을 받아, 더 힘차게 살아갈 용기를, 더 멋지게 사랑할 열정을 선물받는다.

정여울 문학평론가

●정여울 국문학을 전공했으며 문학과 대중문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글을 써오고 있다. 『시네필 다이어리』 『정여울의 문학멘토링』 등을 냈다.

[인터뷰] 뇌의 신비 풀면 진보·보수 갈등도 풀 수 있어
『… 뇌과학의 모든 것』 낸 박문호

그림으로 읽는 뇌과학의 모든 것
박문호 지음, 휴머니스트
784쪽, 5만8000원

뇌과학은 최근 출판계의 주요 화두다. 1년에 50여 종이 출간되고 있다. 하지만 뇌과학을 본격적으로 다룬 국내 저작은 드물다. 그런 점에서 『그림으로 읽는 뇌과학의 모든 것』(휴머니스트)은 단연 눈길을 끈다.

 2008년 『뇌, 생각의 출현』을 냈던 뇌과학 전문가 박문호 박사(54·한국전자통신연구원 책임연구원)가 600여 장의 그림과 도표를 통해 뇌의 구석구석을 파헤쳤다. 800쪽 가까운 두려운 분량이다. 박 박사의 전공은 전자공학. 하지만 그가 운영하는 자연과학 커뮤니티 ‘박문호의 자연과학 세상(mhpark.or.kr)’ 뇌과학 강의에는 뇌과학·심리학 교수들이 수강생으로 등록할 만큼 전문성을 인정받고 있다.

박문호

 -뇌과학 백과사전 같다.

 “인간의 두뇌는 5억년 진화의 산물이다. 그만큼 뇌 자체가 복합적이다. 뇌의 발생부터 진화, 의식, 꿈, 언어, 신경과학까지 포괄적으로 접근하는게 의미 있다고 생각했다. 지난 5년 간 뇌과학을 강의하다 보니 강의수첩이 40여 권 쌓였다. 해외서적과 최신 논문을 참조한 따끈따끈한 자료가 너무 아까워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었다.”

 -미국 텍사스 에이앤엠(Texas A&M) 전자공학 박사 출신인데.

 “유학시절 천문학에 관심을 갖게 됐고, 15년 전 귀국해서는 천문학 강의에 매달리기도 했다. 별을 관찰하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자연스레 부딪히게 됐다. 처음엔 종교나 철학이 인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공부하면 할수록 분자생물학·세포학·생리학·뇌과학이 정답에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뇌과학은 인간을 이해하는 데 어떤 답을 줄 수 있나.

 “인간이 느끼고, 기억하고, 학습하고, 계획하고, 언어라는 추상적 기호를 사용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두뇌다. 그런 뇌의 작용을 모르고 인간이라는 ‘현상’을 이해할 수 있을까. 뇌에 대한 공부야말로 생물학적 존재인 자신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 그림을 많이 쓴 이유는.

 “명료한 그림은 과학 공부에 매우 중요한 요소다. 생물의 형상과 구조는 기능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구조를 정확히 아는 게 매우 중요하다.”

 -오바마 정부의 뇌프로젝트 발표를 보며 감회가 남달랐겠다.

 “물론이다. 뇌과학은 단순한 과학 분야가 아니다. 삶을 총체적으로 디자인하기 위해 필요한 핵심 학문이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는 영역이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의료뿐만 아니라 진보·보수 갈등, 도시 환경 등 모든 분야를 변혁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

 그는 이번 책은 “뇌과학을 직접 공부할 사람들을 겨냥했다. 공부라는 것은 전공에 구애받을 이유가 없다. 운동만 취미활동으로 할 게 아니라 공부 역시 취미로 하는 사람이 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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