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공단 뒤통수 맞은 통일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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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소모적 짓거리가 어디 있나요. 장관님께서 ‘마중물(펌프의 물을 퍼올리기 위해 넣는 물)’이란 표현까지 쓰며 개성공단의 안정적 운영을 언급했는데….”

 통일부 관계자는 4일 출입기자들과 만나 북한의 개성공단 출경 차단조치를 강하게 비판했다. 류길재 통일부 장관이 지난 2일 첫 기자간담회에서 “개성공단은 남북관계의 마중물”이라고 긍정적인 평가를 했는데 이튿날 우리 근로자의 발목을 묶는 조치를 북한이 꺼내든 걸 지적한 것이다. 류 장관은 간담회 때 “마중물이 없으면 물 끌어올리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며 개성공단만큼은 남겨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방위로 대남 위협 파상공세를 펼치던 북한이 개성공단까지 볼모로 삼고 나서자 통일부는 당혹스러운 분위기다. 이틀째 계속된 북한의 조치에도 불구하고 뾰족한 대응카드가 없다는 점에서다. 북한의 막무가내식 행동에 통일부가 내놓은 건 네 문장의 ‘유감 및 정상화 촉구’ 성명(3일)뿐이다. 공단 폐쇄와 같은 최악의 사태가 벌어질 경우 통일부가 개성공단에 대해 지나치게 장밋빛 전망을 하다 뒤통수를 맞았다는 비판 여론이 제기될 수도 있다.

 통일부는 지난달 27일 박근혜 대통령에게 올해 업무를 보고하면서 9개 중점 추진과제 중 ‘개성공단 국제화’를 네 번째에 올렸다. 개성공단 해외시장 확대를 통해 박 대통령이 강조해온 ‘창조경제’에 이바지한다는 게 핵심이다. 현재 ‘개성(북한)산’으로 돼 있는 공단 생산품을 미·중·유럽연합(EU)과의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에서 한국산으로 인정받는 것도 포함됐다. 국가 IR(투자설명회) 개최 등 외국기업 유치와 해외 판로확대의 지원도 담겼다. 하지만 일주일 만에 개성공단의 존폐 문제가 거론되는 상황을 맞았다.

 한 당국자는 “800명 안팎의 우리 국민이 체류하는 상황에서 솔직히 정책수단이 제한되는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 현 상황에서는 북한에 130여 일 억류됐다 2009년 8월 풀려난 공단 근로자 유성진씨 사태 같은 불상사가 생기지 않길 바랄 뿐이란 얘기다. 국방부가 마련한 인질구출 계획도 “할리우드 영화에나 나올 법한 현실성 없는 대안”이란 말이다.

 일각에서는 개성공단에 대한 정부의 무른 대응이 툭하면 북한이 폐쇄위협을 들고나오는 상황을 초래했다고 지적한다. 익명을 요구한 대북 사업가는 “비상상황임을 감안해 북한 당국에 우리 근로자에 대한 특별신변보장을 요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북측이 이를 수용치 않을 경우 인력을 빼고 문을 닫겠다는 단호한 자세로 대북협상에 임해야 북한의 나쁜 습관을 끊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박근혜 정부가 ‘북한을 과연 신뢰할 수 있는가’라는 고민을 더 해봐야 한다는 주문도 나온다. 김정은이 직접 나서 ‘핵 불바다’ 발언을 하는 등 엄중한 상황변화가 있었다는 점에서다. 북한의 도발행동이 수그러질 때까지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 골간인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유보하자는 주장도 있다. 무작정 대북 신뢰만을 강조하면 정작 국민들의 신뢰를 잃을 수 있다는 것이다. 김영수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북한이 찬물·더운물 중 어느 수도꼭지를 트느냐를 보고 우리가 탄력 있게 남북관계의 수온을 맞춰야 한다”며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는 무작정 더운물만 틀려는 것으로 국민들에게 비춰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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