쿨한 영화 '피도 눈물도 없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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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승완 브랜드라는 걸 만들고 싶다" 데뷔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만든 뒤 류승완 감독은 어느 인터뷰에선가 이런 얘기를 한 적 있다. '피도 눈물도 없이'는 그의 포부가 충분히 현실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피도 눈물도 없이'의 액션장면은, 황홀하다. 공중에서 재주를 부리다가 상대를 후리는 발차기, 상대의 얼굴을 정면으로 공격하는 주먹질, 그밖에 여러 액션이 포진하고 있다.

영화는 한국영화에서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호쾌한 장면을 선보인다. 본격적인 장편영화로선 류승완 감독의 첫영화라고도 할수 있는 '피도 눈물도 없이'는 연출자의 행보에 관심있던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짐작할수 있었던 작업이다. 개성있는 캐릭터들을 보기좋게 연결시킬 것. 여성액션극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점할 것. 무엇보다 피가 튀고 눈부신 액션에 집중할 것. 영화는 이 기대를 많은 부분 만족시킨다.

왕년의 금고털이 경선은 택시 운전사로 일하고 있다. 경선은 과거에 진 빚으로 칠성파에게 쫓기는 신세다. 우연히 차사고로 만난 수진은 돈을 벌 건수가 있다고 경선을 유혹한다. 투견장을 관리하는 독불의 애인인 수진은 사채업자 김금복의 돈을 가로채려는 것. 수진은 경선의 도움으로 돈을 빼돌리려고 하지만 일은 쉽게 풀리질 않는다. 수진과 경선, 그리고 독불과 형사의 정보원 노릇을 하는 채민수, 경찰, 그리고 칠성 일당이 돈의 행방을 뒤따르기 시작한다. 이들은 얽히고 설키면서 서로를 의심하고 돈을 중심으로 이합집산을 거듭한다.

'피도 눈물도 없이'는 새로운 영화는 아니다. 쿠엔틴 타란티노나 가이 리치 감독 영화에서 볼수 있었던 복잡한 플롯, 엉뚱한 유머를 뒤섞으면서 장르영화 변주하기를 시도한다. 그런데도 영화를 보고 있으면 뭔가 색다르다. 요컨대 영화는 경제성의 원칙을 철저하게 지킨다. 불필요하게 늘어지는 대목 없이, 간단한 설명과 요약만으로 이야기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다. 만화적인 기법도 눈에 띈다. 독불이 동네 청년들과 격돌을 벌이는 영화의 액션장면은, 눈부시다. 편집과 슬로우 모션, 그리고 영화의 리듬을 적절하게 늘였다가 바싹 조이는 방법으로 비장한 주먹대결의 카타르시스는 배가된다.

인물의 설명 방식도 간결하다. 밀린 빚을 받으러왔던 건달들이 장면이 바뀐 뒤 상대방과 소주잔을 기울이는 것, 수진의 제안을 거절했던 경선이 택시에 묻은 토사물을 닦아내다가 생각을 바꾸는 것, 수진과 경선의 오해가 풀리는 과정을 분할 화면으로 설명하는 장면 등 류승완 감독은 다양한 테크닉으로 이야기를 명쾌하게 풀어간다.

'피도 눈물도 없이'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어쩌면 낯설게 보일수도 있다. 그들이 너무나 폭력적이고 비정하며 냉혹하기 그지없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이는 영화의 매력이다. 사채업자가 (아마도 손자로 추측되는) 어린아이의 예쁜 손을 잡은 채 전화기에 대고 "그 새끼 사지를 찢어버려!"라고 호통을 치거나 우리에겐 TV 탤런트로 익숙한 백일섭 등의 배우가 선글래스를 낀채 주먹을 휘둘러대는 대목은 묘한 쾌감을 준다.

단편 옴니버스였던 전작에 비해 '피도 눈물도 없이'는 연출자의 스타일이 빛난다. 전형적인 오락영화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 흐트러진 호흡없이 감독은 일직선으로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영화의 결말은 정말 뻔하다. 개인적으로는, 영화 중간에 어느 정도 결말을 예상할수 있었으며 대충 맞출수 있었다. 그게 이 패기만만한 장르영화의 장점이자 또한 별로 미워할수 없는 약점이다.

'피도 눈물도 없이'는 홍콩 느와르와 할리우드 B급 영화를 비롯한 다양한 영화들을 인용하면서(때로는 할리우드 공포영화 같은 대목도 있다. 죽지 않고 계속 살아나는 좀비?!) 독창적인 하드보일드 스타일을 완성해낸다. 장난스럽지 않게, 그렇다고 지나치게 어깨에 힘주지 않으면서. 이상하게도, 영화 보는 동안 내내 목이 말랐다. 영화 속 인물들은 한순간의 느슨함도 없이, 욕과 주먹으로 세상을 돌파하려고 발버둥치고 물론 대부분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한다. 그 메마르고 거친 감성을 '피도 눈물도 없이'는 제대로 살려낸다. 아주 쿨(Cool)하게.

김의찬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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