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완전한가, 그렇다면 지금 사랑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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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도 알지 못한 채 냉소하고 또 냉소하던 한 시절의 버릇은 여전히 나에게 남아 있다. 그 때 가급적 코미디처럼 살고 싶었던 나는 무엇인가에든 섣불리 마음을 주지 않은 채 가볍게, 그저 가볍게 사는 것만이 '비교적 적절한' 행동방침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돌이켜 볼 때 냉소라는 것은 결코 함부로 지어서는 안 되는 것이며 코미디처럼 가볍게 사는 것 역시 엄숙하게 사는 것 이상으로 어렵기 그지없는데, 그땐 왜 그랬을까?

남자와 여자들 사이(혹은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일 수도 있다)의 연애만큼 소모적인 동작은 세상에 없을 거라는 생각 역시 그 무렵부터 생겨났다. 생면부지의 남녀가 만나 맹인처럼 사랑을 나누고,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토라지고, 다시 맹인이 되고. 도대체 그보다 자기 기만적인 동작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사랑의 고백도, 토라졌을 때의 분노 섞인 말도 따지고 보면 다 거짓말이 아닌가.

그러나 이 세상 그 어떤 일도 그 정도쯤은 소모적이거나 기만적이기 마련임을 생각할 때, 문제는 나에게 있었다. 사랑이 아닌 내가 비뚤어져 있었다. 필요와 충분 조건 모두 완벽하게 들어맞는 사랑만이 진짜라고 생각. 그게 문제였던 것 같다.

『침대맡 남자』(에릭 올데르 지음, 윤정임 옮김, 솔)는 '사랑이란 불완전한 두 사람이 만나 완벽한 하나를 이루는 것'이라는 사랑에 대한 구태의연한 정의를 그야말로 '쌈박하게' 보여주는 소설이다. 기억력이 좋지 않은 전직 복서 '남자'와 교통사고로 전신이 마비된 서른 살의 여자 '뮈리엘'. 두 사람은 간병인과 간병인의 도움 없이는 결코 '볼일'을 보지 못하는 관계로 만난다.

초면의 동갑나기 남자에게 치부를 보여야만 하는 뮈리엘과, 그녀의 치부를 거들어주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남자의 관계는 상대방의 '치욕'을 전제로 한 관계다.

"당신에게 몇 가지 설명해 드리죠. 내가 누군가를 만나는 건 그 사람에게 내 치부를 보이기 위해서예요. 그 사람이 내 오물을 치워낼 때도 그를 하찮게 여기진 않아요."(62쪽)

그런데 이상하게도 치욕과 치욕, 상처와 상처의 만남은 덧나거나 아프게 부푸는 일이 없다. 커튼 쳐진 방에만 틀어박혀 있던 뮈리엘은, 남자의 손길을 받아 정원으로 한 발 나오고, 그리고 서점으로, 남자가 예전에 일했던 레스토랑으로, 그리고 더 멀리 소나무 숲이 있는 바닷가로 나아간다. 그러는 사이 기억조차 온전치 못한 가난한 권투선수 출신이 감히 누굴 사랑할 수 있을까, 안면 근육 밖에 움직이지 못하는 일급장애인이 누구에게 마음을 줄 수 있을까, 라는 뒷걸음질은 차츰 사라지고 치욕과 상처 틈새로는 도독한 새살이 솟는다.

뮈리엘이 집으로 돌아가는 남자를 향해 "감기 걸리지 말아야"라고 말한 뒤, 그리고 1초도 지나지 않아 "당신을 걱정해서가 아니라 나를 돌보지 못할까봐 하는 소리예요."라고 덧붙이는 부분은, '짧고 정확한 문장으로 평범한 일상에 감추어진 희미한 빛을 포착'한다는 이 작가의 매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프랑스의 어느 시골에서 외부와의 접촉을 일체 삼간 채 지낸다는 이 글의 작가는 굳이 많은 것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법이 없다.

하다못해 이 소설의 화두가 된 '사랑'에 대해서도 절대로 왈가왈부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이 두 불완전한 남녀의 만남과 그로 인한 두 마음의 흐름을 보여주고만 있을 뿐이다. 행간의 여유를 느낄 수 있어 더욱 좋은 소설이랄까? 허나, 이 작가가 가진 문체적 장점과 그 특징을 보여주기에 이 책의 한국어 번역은 아무래도 좀 아쉽다. (이현희 / 리브로)

자료제공:리브로(www.libr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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