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년 세월 흐르도록 위로받지 못한 ‘폭도’를 위한 진혼곡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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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호 24면

‘지슬’의 오멸 감독은 지금까지 제주도에 관한 장편 영화만 찍었다. 그는 제주도 사람이다. 몇 년 전 그의 전작 ‘뽕똘’을 두고 대화를 나누던 중, 영화 후반부에 누구나 한 번 보면 잊지 못할 아름다운 바닷가 언덕이 실제로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 장소는 이제 예전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아요. 올레길 관광명소를 만든다면서 사람들이 새로 길을 냈지요.”

영화 ‘지슬’

그는 자꾸 상처받고 훼손되는 제주도 땅을 보는 게 싫어서 육지로 넘어와 생활하고 있다. 그의 영화에선 제주도 사람 내부자의 정서로 만들어낸 감흥이 느껴져 좋다고 말했더니 감독은 기분 좋게 반응했다. “내부자라고 말하는군요. 보통 우리는 육지 사람들에게 외부자로 불리거든요.”

제주 4·3 사건이 소재인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2’(이하 ‘지슬’)는 내부자의 심정으로 찍은 일종의 제사와 같은 영화다. 이 영화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건의 전모는 단촐하다. ‘1948년 제주도에 소개령이 내려졌고 해안선으로부터 5㎞ 바깥의 사람들은 폭도로 간주하고 사살에 들어갔다’는 간단한 자막뿐 다른 설명은 없다.

사람들은 군인들을 피해 산속으로 피난해 떨고 있고 그들을 잡으러 다니는 군인들은 피로에 시달리며 광기를 보인다. 덩어리로 제시된 이야기의 구멍을 메우는 것은 흑백 화면에 장엄하게 담긴 제주도의 산하다. 겨울을 배경으로 제주도의 검은 돌로 덮인 무뚝뚝한 대지, 거친 파도의 하얀 포말, 그리고 슬픈 기색의 먹구름과 순백으로 빛나는 눈밭 등이 인물들의 배경에 보인다. 예쁜 관광엽서의 풍경과 비교할 수 있는 차원의 그림이 아니다. ‘지슬’의 화면에는 제주도 사람들이 모시는 1800여 신령들의 기운이 서려 있다. 예민한 관객이 그렇게 느끼도록 오멸 감독은 흡사 신령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심정으로 그렇게 화면을 찍었을 것이다.

카메라를 도구로 삼은 제사 같은 영화
대체로 호흡이 긴 ‘지슬’의 화면은 처연하고 무심하며 때로는 다른 세상으로 입구가 가까이 늘 열려 있다는 착각을 준다. 영화 속 섬사람들이 군인들을 피해 자기들만 아는 동굴에서 지슬(감자를 뜻하는 제주도 방언)을 나눠 먹는 장면이 특히 그렇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도 사람들은 마을에서 그렇게 지냈던 것처럼 이곳에서도 자잘한 말다툼으로 소일한다. 서로 빈정대면서도 그들은 먹을 것을 나눠 먹는다. 화면은 느리게 옆으로 이동한다. 남녀노소 다양한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원경으로, 근접화면으로, 중간 크기의 화면으로 보인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무대를 보는 듯 연극적인 이 화면에서 우리는 누군가의 힘으로 밀려나가는 기운을 느낀다. 계속 옆으로 가다 보면 어딘가 다른 세상의 입구가 열려 있지 않을까, 그들이 설혹 불행을 맞더라도 위로 받을 데가 있지 않을까 감독은 기도하는 것 같다.

내 편 네 편 나뉘어 여전히 싸우고 있는 이 땅의 현실에서 ‘지슬’의 감독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땅의 선조들에게 진한 눈물을 담은 영화 제사를 지낸다. 군인들의 먹이로 도살당하는 돼지를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각도로 찍은 영화 속 한 장면에서 꽥꽥거리는 한 생명체의 마지막 모습은 그게 누군가의 시점으로 보이기 때문에 다소 위안이 된다. 그 장면이 끔찍한 것은 인간의 먹거리를 위해 치러지는 무심한 일상이 영화 속 양민 학살의 광경과 겹쳐지기 때문이다. 역사적 비극은 극적 사건의 맥락 속에서 벌어지지 않고 지극히 일상적으로 우리가 의식하지 않는 사이에 일어난다.

그러나 누군가는 보고 있다. 이 세상의 부조리한 질서를. 죽은 듯 잠잠한 제주도 삼라만상이 깨어 인간들의 사건을 보고 있다는 느낌은 카메라를 제사 도구로 이용한 오멸 감독이 해낸 최고의 성취다. 아마도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정물화의 이미지들처럼 수많은 영상들이 잔상에 남을 것이다.

다음 화면으로 넘어가면 되돌아갈 수 없는 영화의 움직이는 이미지들처럼 우리의 인생도 지나간 것은 되돌릴 수 없다. 그래도 이 영화 속 어떤 장면들은 우리의 뇌리에 남아 불멸한다. 오멸 감독이 신령의 기운을 빌려 살려낸 불멸의 이미지들이다. 그걸 간직하며 누군가는 여전히 눈물을 흘릴 것이다. 죽은 자에 대한 예의로 이것 이상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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