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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전남 담양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땅의 형세가 행주형이라 했다. 본시 메마른 고장이더니 땅 한가운데에 기둥을 높이 세운 뒤부터 날로 윤택해 졌다. 그 기둥은 곧 배의 돛대요, 이로써 담양땅에 생명이 불어넣어 졌다는 민간 설화이다.
읍내 객사리. 높이 10「미터」의 이 찰간은 크나큰 옛 절터임을 입증하는 유물이지만 그보다 훨씬 앞서 이곳 선조들이 크게 무리 지어 정착했던 것임을 상기시킨다.
영산강 상류인 용강이 짐짓 들을 펼쳐 담양평야를 이루었다. 사방이 백암. 추월, 금성, 무등 등 높은 산들이 둘러싼 아늑하고 따사로운 이 지역. 용강을 막아 수리공사를 한 「관방제」가 이르기는 백제 때의 것이라 하나, 어쨌든 일찍부터 살기 좋은 고장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 산 역사로 남아있다.
담양 사람들의 그런 노력이 오늘날 첫 손꼽히는 죽세공의 고장을 이룬 것이리라. 어느 가정을 둘러보아도 자랑거리는 대 다루는 솜씨요, 그 수확이 얼마나 살림에 보탬됐느냐로 화제가 풍성하다. 7살짜리 어린이의 손에서 하루 대바구니 열 댓개가 엮어진다는 것은 그리 대견찮은 「에피소드」.
물론 군민의 주업은 농업이다. 그럼에도 그 22%가 죽세공을 전업하거나 혹은 농가의 부업으로 삼고있다. 야산이면 으례 울창한 죽림이다. 죽림이 차지한 총면적은 6백평방「킬로」. 우리나라 전체 죽림의 15%에 해당한다.
담양 사람들은 다른 지방처럼 선조가 남긴 유형의 문화재를 자랑치 않는다. 4백년 전 유희춘의 「미암일기」(보물260호) 며 정송강의 「식창궁」등이 있지만 그것을 관광거리로 삼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들이 오늘 근면하고 있는 모습을 자랑스레 내놓아 부끄럽지 않다고 생각한다. 연전엔 읍내 복판에 죽세공품 전시장을 마련했다. 바구니·과반·「핸드백」·발·부채·낙죽 등 확실히 토속적인 선물이요 관광거리다.
담양의 죽물은 연간 수입 2억원―그럼에도 이곳 사람들의 생활은 윤기가 업다. 네 댓 식구가 손 모아 봤자 월 실수입이 고작 2, 3천원. 아무래도 영세산업이요 퇴화일로에 빠진 수공업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담양의 고민이 있다. 가내 수공업의 현대화라는 어려운 과제에 부딪쳐 있다. 그래서 꾀하게된 꿈이 기업적 대량생산으로의 전환이요 그 첫 발판으로 「죽물공예센터」를 설립했다. 그것이 66년11월.
대를 토막내고 빠개고 깎고 다듬는 등 12종의 기계 52대를 우선 들여놨다. 양성소에서는 연 1백명의 지도자를 배출하여 산간 마을에까지 능률의 손길을 뻗칠 예정이다.
그러자면 죽림도 현재의 것 만으론 턱없다. 현재도 부족해 군내 생산량의 2배 가까운 3만속을 밖에서 사들이는 형편이므로 적어도 1천 정보의 죽림을 더 조성할 계획이다. 그래서 70년쯤에는 외화획득 1백만「달러」 국내수요까지 합하면 4억원.
그러나 숫자상으로 풍성한 앞날이지만 또 하나 난관을 겪어야 하지 않을까. 난관은 곧 「디자인」 문제다. 지난 반세기 동안 고유한 멋도 야무진 솜씨도 그들의 손끝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생산자도 위정자도 수량에 눈이 어두워 저들이 본래 지녔던 품격과 자랑에는 관심이 없다. 담양을 아끼는 이들의 혹평을 외면해서 좋을까.【이종석 기자】

<메모>▲면적=4,549㎢ ▲인구=28만6천명 4만9천호 ▲행정구획=12읍 면 260리(자연부락251) ▲논=883㎢ 밭=377㎢ 임야=2,823㎢ 기타=465㎢ ▲교육시설=고교1 중학 2 국민교 22 ▲특산=죽세공품·갈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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