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 중공 문화혁명의 이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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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모택동이 65년 11월 강청의 암약과 주은래의 도움으로 상해를 거쳐 항주로 간 후 어떻게 해서 다시 북평 장악에 성공했는가를 「유고」의 신문 「폴리티카」지의 현지 특파원은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모택동이 상해를 거쳐 항주로 간지 반년 후인 작년 4월말께, 푸른 인민복을 입은 팽진 (숙청된 전 북평 시장)은 두 사람의 경호를 받으며 유소기와 주은래가 사는 주택 지구를 방문했다. 그 동안에 팽진의 본거지인 북평시 당위가 무장한 군분유대에 의해 포위되었다. 이 때문에 팽진은 사택에서 그가 장악하고 있던 공안경찰의 보호아래 활동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두달 후 6월초에 모파는 총반격을 시작했다. 임표는 심복의 양성무, 양용의 두 장군에게 『곧 북평으로 가서 강제로라도 인민일보, 북평 방송국, 신화사를 접수하여 북평시 당위를 개조하라.』고 명령했다.
이 조처는 며칠만에 성공하여 북평의 선전기관은 모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이에 대해 유파는 대대적인 반격을 꾀했다. 그들은 당 중앙위원을 임시로 소집하여 모·임 체제의 퇴진을 계획했다. 먼저 다수를 제하기 위해서는 당 총서기 등소평의 도움을 빌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이설봉(화북국 제1서기)을 통해 맹렬히 포섭 공작을 시작했다. 일은 잘 진행된 모양이었다.
7월 중순 각지의 중앙위원들이 속속 북평으로 모였다. 유력한 위원은 유소기와 팽진의 집에 초청되어 그곳에서 숙박했다.
이 가운데는 「우람푸」(내몽고의 통치자), 이정천 등 거물이 섞여 있었다.
7월 18일- 모택동은 『당 중앙위엔 출석 할 테니 내가 출석하게 될 때까지는 열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7월 21일로 예정된 임시 당 대회를 유소기가 연기할 리는 없었다. 유에겐 다시없는 기회가 왔다.
그러나 그날 정오께 북평에는 괴이한 소문이 떠돌았다. 임표가 정예부대를 이끌고 시내로 진주, 나서경을 체포했다는 소문이었다. 그러나 북평에는 병사라곤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실은 북평 교회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 증거로는 북평을 연결하는 철도는 분단되고 남경∼무한의 연선은 임표 손아귀에 들어 있었다.
다음 날인 19일 임표군은 소리도 없이 북평을 떠나 산서성으로 향하여 서쪽에서 진격해 오는 협서성군의 동방 진출을 막을 포진을 취했다.
협서성군을 쥐고 있는 것은 신강군구 사령 왕은무(당 중앙위원)로서 나서경의 심복이었다.
내전의 위기는 각일각 다가왔다. 총화가 퉁길 직전 한 통의 전보가 이 비극을 구했다. 당 본부로부터의 전보를 받은 협서성군의 사단장이 전진을 정지한 것이다.
7월 21일- 바야흐로 회의가 열리려는 직전 사태는 뜻밖에 역전되었다. 등소평이 『모가 올 때까지 회의를 연기하자.』고 말하고 나섰다. 등은 모·임의 반격을 받아 표변한 것이다.
그후는 급전 직하, 쫓기던 모가 거꾸로 유를 쫓기 시작한 것이다.
8월- 연기됐던 11중전회가 열렸다. 공표된 문서엔 양파의 투쟁은 일언반구도 씌어 있지 않았으나 중대한 위협이 있었던 것을 말하는 유일한 증거가 있다. 임표가 모에 다음 가는 실력자로 승진하고 유소기가 제2위로부터 8위로 전락한 사실이 그것이다.
동시에 모가 지휘하는 홍위대가 출현하고, 12월엔 팽진이 홍위대에 의해 체포되는 등 거센 숙청의 바람이 일었던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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